※ 스포주의9년 동안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래 하다보니 상대가 지금 화가 났는지, 설명이 더 필요한지,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를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겠더라구요.참 이상한 게 남의 기분을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반대로 내 상태는 뒤로 미뤄버립니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표정이 굳어 있고 아무 말도 하기 싫어졌는데도, 저는 그저 일을 잘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직장 내부 인간관계에서까지 지쳐가면서 번아웃이 왔다고 느낄 때쯤에야 겨우 그만뒀습니다. ‘나는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은가’라는 가장 가까운 질문을 끝까지 뒤로 미뤘던 겁니다.영화 〈관상〉을 보고 나서 그때의 일이 생각나더군요. 남의 얼굴을 읽는 사람한재림 감독의 2013년 영화 〈관상〉에는 조선 최고의 관상가 내경이 등장..
※ 스포주의수능 보던 날 수리1영역 주관식 1번. 쉬운 문제입니다. 근데 그 문제가 계속 안 풀렸습니다. 손이 덜덜 떨렸고, 시간은 자꾸 가고, 당황하니까 더 안 풀렸습니다. 결국 그냥 2라고 썼습니다. 찍은 거죠. 근데 그게 맞았습니다.기분이 이상했습니다. 맞았는데…어려운 문제도 아닌데 제대로 풀어서 맞혔다면 더 좋았을걸 뭔가 억울한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어쨌든 다행이고 좋긴 했는데 뭔가 찜찜했습니다. 영화 를 보고 나니 20년도 더 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질문을 포기한 수학저는 수학을 포기한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중위권 정도는 유지했습니다. 어찌어찌 열심히 해서 거기까지 갔습니다. 근데 정확히 알고 있다는 시원한 느낌은 없었습니다. 어느 단계에서부터 막혔는지도 모르는 채로 계속 올라온 ..
※ 스포일러 주의어릴 때 명절에 할머니 댁에 가면 저는 좀 이상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말은 들리는데 뜻은 모르는 사람. 갑자기 외국에 온 것 같은 느낌.부모님이 두분 다 강원도 강릉 출신이신데 저는 서울에서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친할머니가 특히 강릉 사투리를 심하게 쓰셨었는데 저는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고녜이(고양이), 감재(감자) 지악(저녁)처럼 발음이 비슷한 건 문맥으로 대충 알아들었지만, 고벵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정말 한참 동안 무슨 동물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무릎이란 뜻이었는데 말이죠.명절 밤에도 그랬습니다. 제가 늦은 시간까지 뛰어다니며 잘 생각을 하지 않자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죠.“낯쎄고 둔눠!”저는 또 어리둥절한 얼굴로 엄마 아빠를 쳐다봤습니다. 세수하고 누우라는 ..
※ 스포일러 주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냐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바꾸고 싶은게 없어서가 아니라, 바꾸고 나면 지금 현재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망설임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알약 열 개의 무게2016년 개봉한 는 홍지영 감독 작품으로,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소아외과 의사 수현은 캄보디아 의료 봉사 중 노인에게 알약 열 개를 받습니다. 삼키면 과거로 돌아간다는, 황당한 조건의 선물이요.수현은 그 알약으로 30년 전 자신을 만나러 갑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연아를 단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어서요. 그러나 젊은 수현과 마주치면서 ‘한 번 보는 것’으로 끝날 ..
※ 스포일러 주의 영화 을 보고 나서 제일 먼저 한 일은 작가 이름을 검색하는 것이었습니다. 박천휴. 이 사람이 또 만든 게 있는지 찾아봤습니다. 영화가 저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은 2023년 제작되어 영화제에서 먼저 상영된 뒤, 2025년 정식 개봉한 이원회 감독의 뮤지컬 영화입니다. 박천휴가 작사하고 윌 애런슨이 작곡했으며, 두 사람이 함께 극본을 쓴 동명 창작뮤지컬이 원작입니다. 신주협과 강혜인이 올리버와 클레어를 연기했습니다. 헬퍼봇이라는 이름의 로봇이 사람을 돕기 위해 만들어진 세상이 배경입니다. 올리버와 클레어, 두 로봇이 여행을 떠나고 사랑을 배웁니다. 줄거리는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저는 이 영화를 보는 1시간 반 동안 질문이 세 번 바뀌었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이 궁금했습니다영화가 시작되..
※ 스포일러 주의 한석규는 전생에 세종이었나 싶었습니다.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세종을 연기했으니 익숙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도 한석규 캐스팅이 찰떡이다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세종은 같은 얼굴을 하고도 조금 달랐습니다.위대한 왕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가 보여준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사람 하나 마음대로 곁에 둘 수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왕의 욕설이 서럽게 들린 이유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장면은 세종이 대신들과 맞서며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이었습니다.“야, 이 개새끼야!”반듯한 세종대왕의 입에서 나온 욕설이라 놀란 게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