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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박시헌 선수는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받은 금메달을 들고 미국 플로리다로 향했습니다. 결승전 상대였던 로이 존스 주니어를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박시헌 선수는 35년 동안 보관해온 금메달을 직접 건네며, 원래 당신이 받았어야 했던 메달이라는 말도 전했습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로이 존스 주니어는 얼굴을 감싸며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촬영된 지 2년이 지난 2025년에야 공개됐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영화 <카운트>를 보고 나서 알았습니다. 영화를 보기 전에는 이 작품이 실화를 모티브로 했다는 것도, 박시헌이라는 이름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친구가 재밌다면서 꼭 보라고 해서 가족들과 함께 틀었습니다. 줄거리도 찾아보지 않고 보기 시작했는데, 보던 중 아빠가 갑자기 말했습니다.
“어! 이거 88올림픽 때 그 복싱선수 이야기네. 이거 실화야. 그때 진짜 좀 황당했었지. 선수 본인은 기분이 어땠을지 상상도 안 간다.”
82년생인 저는 서울올림픽 당시 너무 어려서 그 경기를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아빠에게는 그날 심판이 박시헌 선수의 손을 들어 올리던 순간과, 정작 이긴 사람답지 않았던 그 표정까지 다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아빠는 벌써 그 시절에 가 있었습니다.

아빠가 먼저 알아본 1988년의 선수
2023년 2월 개봉한 권혁재 감독의 <카운트>는 박시헌 선수의 삶을 모티브로 만든 코미디 휴먼 드라마입니다. 영화는 서울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서 10년이 지난 1998년의 진해를 배경으로 합니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시헌은 복싱을 그만두고 고등학교 체육교사로 살아갑니다. 금메달을 따고도 축하받지 못했던 그는 자신이 복싱선수였다는 사실을 감추려 합니다. 금메달도 집 안 깊숙한 곳에 넣어둔 채 꺼내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헌은 복싱대회에서 윤우를 만납니다. 윤우는 상대 선수를 압도하고도 어른들의 승부조작 때문에 패배합니다. 분을 참지 못한 윤우는 복싱을 포기하고 전학까지 오지만, 사람이 찾지 않는 낡은 체육관에서 혼자 훈련을 계속합니다.
시헌은 그런 윤우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봅니다. 경기 밖에서 벌어진 일 때문에 선수 인생 전체가 망가졌기 때문이죠.
시헌은 결국 학교 복싱부를 다시 만듭니다. 교장의 허락을 받기 전에 학생부터 모으는 ‘선조치 후보고’ 방식으로요. 복싱을 아예 해본 적 없는 학생들까지 불러 모아 운동장을 뛰게 하고, 지쳐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라고 소리칩니다.
박시헌 선수가 진해중앙고 체육교사로 근무하며 복싱부를 지도한 것은 실화입니다. 다만 윤우의 경기와 학생들의 세부적인 사연에는 영화적인 각색이 들어가 있습니다. 실화의 무게를 그대로 끌고 가기보다는 학생들의 성장과 코미디를 더해 편하게 볼 수 있는 스포츠 영화로 만든 겁니다.
금메달을 따고도 고개를 들지 못했던 사람
1988년 서울올림픽 복싱 라이트미들급 결승전에서 박시헌 선수는 미국의 로이 존스 주니어와 맞붙었습니다.
경기 후 널리 인용된 펀치 집계에서는 로이 존스 주니어가 86회, 박시헌 선수가 32회를 적중시킨 것으로 나옵니다. 로이 존스 주니어가 확실히 앞선 경기였지만 심판 판정은 3대 2로 박시헌 선수의 승리였습니다.
판정이 발표됐을 때 박시헌 선수는 기뻐하지 못했습니다. 졌다고 생각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손이 올라갔으니까요.
링 위에 서 있던 박시헌 선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이겼다고 기뻐할 수도 없고, 자신이 내리지 않은 판정을 대신 해명할 수도 없는 상황에 있는 그 찝찝한 기분이요.
이후 심판 매수 의혹까지 제기됐지만 IOC 조사도 진행됐지만 결과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판정을 내린 사람은 박시헌 선수가 아니었지만, 국내외에서 쏟아진 비난은 대부분 그의 몫이 됐습니다.
‘억지 금메달’, ‘국민 망신’이라는 말까지 들어야 했고, 금메달을 반납하라는 요구도 이어졌습니다.
영화 속 시헌이 윤우에게 유난히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윤우를 가르치는 일은 단순히 제자 한 명을 훌륭한 선수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윤우가 링 안에서 보여준 실력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고, 동시에 시헌 자신이 다시 복싱 앞으로 돌아오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스포츠 영화라면 마지막 승부가 가장 중요할 것 같지만, 저는 시헌이 다시 체육관에 들어가는 순간이 더 좋았습니다. 이미 한 번 무너진 사람이 자신을 무너뜨린 장소로 돌아가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요.
진선규 배우의 연기도 이 영화와 잘 어울립니다. 영화의 배경인 진해는 진선규 배우의 실제 고향이기도 해서 사투리가 억지스럽지 않습니다.
학생들을 몰아붙일 때는 고집 센 체육 선생님인데, 금메달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 굳어버립니다. 크게 울거나 억울함을 설명하는 장면이 많지 않아 오히려 시헌이 숨겨온 시간이 더 잘 보였습니다.
성유빈이 연기한 윤우. 진선규와의 케미도 너무 좋았습니다. 부당한 판정으로 상처받은 어른과 승부조작 때문에 링을 떠난 아이가 서로를 알아보는 관계말입니다. 둘이 처음에는 계속 부딪히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헌이 윤우를 가르치는 것인지 윤우 덕분에 시헌이 다시 일어서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집니다.
영화가 끝난 뒤 완성된 마지막 장면
<카운트>는 2023년 2월에 개봉했습니다. 그리고 영화가 개봉한 지 석 달쯤 지난 그해 5월, 박시헌 선수는 실제 금메달을 들고 로이 존스 주니어를 찾아갔습니다.
영화에는 담길 수 없었던 현실이 직접 찍은 마지막 장면이었습니다.
박시헌 선수가 금메달을 건넸다고 해서 올림픽 공식 기록이 바뀐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공식 기록에는 박시헌 선수 금메달, 로이 존스 주니어는 은메달로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두 선수에게 그 만남은 기록과는 다른 의미였을 겁니다.
영화가 끝난 뒤 가족들과 한동안 박시헌 선수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는 당시 경기를 본 기억을 다시 꺼냈고, 저는 실제 경기와 그 뒤의 이야기를 찾아봤습니다. 친구가 재미있다며 추천해준 영화 한 편을 보다가 우리 가족은 1988년까지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저는 스포츠 영화의 감동은 누군가가 마지막에 이기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카운트>는 이미 금메달을 딴 사람이 그 승리 때문에 무너졌다가 다시 복싱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이기는 것보다 다시 시작하는 일이 더 중요하게 보였던 이유입니다.
1988년의 박시헌 선수는 스물세 살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결정하지 않은 판정 때문에 35년 동안 금메달의 무게를 견뎌야 했습니다.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날보다 자신의 손으로 그 메달을 건넨 날, 박시헌 선수의 마음이 더 편했기를 바랍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카운트> 포토
※ 참고 자료
- 영화 <카운트> 공식 작품 정보
- 중앙일보 – 박시헌 선수·권혁재 감독 인터뷰
- Reuters – 박시헌·로이 존스 주니어 금메달 전달 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