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큰 기대 없이 튼 영화가 제일 위험합니다. 마음에 방어막이 없으니까요. 저한테는 <장르만 로맨스>가 그런 영화였습니다.
제목부터 대놓고 코미디라고 말하는 영화라 웃을 준비만 하고 앉았는데, 두 시간 뒤에는 얼굴에서 웃음기가 빠져 있었습니다. 저는 분명 웃으려고 튼 영화였거든요.
2021년 11월에 개봉한 <장르만 로맨스>는 배우 조은지의 감독 데뷔작입니다. 류승룡과 오나라, 김희원, 무진성 등이 출연하고 러닝타임은 113분입니다.
내용은 슬럼프에 빠진 베스트셀러 작가 김현의 주변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로맨스들. 여기까지만 들으면 흔한 코미디 같지만, 다 보고 나면 이 제목이 일종의 농담이었다는 걸 알게 됩니다.

제목이 미리 쳐 둔 농담
이 영화에는 제대로 된 로맨스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7년째 글을 못 쓰는 작가 김현이 있고, 그의 전처가 있고, 그 전처 미애와 몰래 연애 중인 절친 순모가 있습니다. 여기에 김현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제자와, 옆집 여자를 짝사랑하는 고등학생 아들까지 얽힙니다. 전부 어딘가 방향이 어긋난 마음들이지요.
그런데 이 어긋남들이 웃기긴 한데 보다보면 뭔가 편하게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초반에는 인물들이 서로 숨기고 들키고 오해하는 소동극으로 신나게 굴러가다가, 어느 지점부터 각자의 사정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합니다.
웃긴 상황은 그대로인데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점점 안쓰러워집니다.저는 낄낄거리며 따라가다가 중반쯤에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생각 없이 볼 영화가 아니었습니다.
구성이 좋다고 느낀 것도 이 지점입니다. 여러 관계의 이야기가 동시에 나오는데도 산만하지 않고, 각자의 사연이 적당한 때에 서로 겹쳐집니다. 한 관계에서 웃음이 터지면 다른 관계에서 마음이 쿵 내려앉는 식으로 리듬이 계속 교차하는데, 이게 지루할 틈을 안 줍니다. 배우 출신 감독의 데뷔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흐름이 탄탄했습니다.
웃기다가 반 박자 뒤에 무너지는 얼굴들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성공한 데는 배우들의 몫이 큽니다. 류승룡은 한 장면 안에서 한심했다가 짠했다가를 자유자재로 오갑니다.
잘나가던 시절의 허세가 아직 몸에 남아 있는데 정작 글은 한 줄도 못 쓰는 남자. 실없는 농담을 하던 얼굴이 반 박자 뒤에 무너지는데, 그게 워낙 자연스러워서 웃다가 미안해지는 순간도 몇 번 있었습니다.
오나라와 김희원이 함께 만드는 장면들도 좋았습니다. 전처와 절친이라는, 설정만 들으면 막장 드라마 같은 조합인데 그게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다. 나쁜 게 아니라 그저 서툰 사람들이라는 게 두 사람의 표정으로 전해집니다.
친구에게 들킬까 봐 전전긍긍하는 소동은 분명 웃긴데, 그 조마조마함 사이로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 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안고 있는 어른들의 연애라는 게 이런 모습이구나 싶은 장면들이었습니다.
김현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제자 유진을 연기한 무진성도 기억에 남습니다. 존경으로 시작한 마음이 어디서부터 애정이 됐는지 본인도 설명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걸 관객도 알고 본인도 아는데, 그래서 그 장면들이 우습고 동시에 아픕니다.
제가 끝까지 몰입해서 볼 수 있었던 건 이 탄탄한 연기들 덕분이었습니다. 코미디는 연기가 조금만 과해도 금방 유치해지는데, 이 영화의 배우들은 그 선을 한 번도 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일
영화에는 좋아하는 마음이 여러 개 나오는데, 방향이 맞는 마음은 별로 없습니다. 누군가는 말하지 못하고, 누군가는 받아줄 수 없고, 누군가는 너무 늦게 알아차립니다. 상황만 보면 계속 코미디인데 보는 마음은 웃지를 못합니다.
김현의 아들 성경이 코인노래방에서 짝사랑하는 옆집 여자 정원에게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있습니다. 노래는 형편없고 상황은 명백히 웃긴데, 저는 웃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짠했습니다. 고백이라는 게 원래 저렇게 대책 없는 일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영화의 웃긴 장면들은 대부분 이런 식입니다. 상황은 코미디인데 그 안의 감정은 진짜라서, 웃음 끝에 묘한 울림이 있습니다.
김현과 전처 미애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여전히 서로를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두 사람. 아들 문제로 투닥거리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게 드러납니다.
사랑은 끝났지만 아들 때문에 여전히 이어져 있는 그 애매한 사이를 영화는 우습고 담담하게 그립니다. ‘관계’라는 게 연애나 결혼 같은 이름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걸 잘 보여줍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저는 웃는 횟수가 줄었습니다. 저 어긋난 마음들이 도무지 남 일처럼 보이지 않아서요. 제 주변의 관계들이 하나씩 떠올랐습니다. 방향이 맞아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관계들, 방향이 어긋난 채로 흐지부지된 관계들.
그리고 이게 핵심인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에 가깝다’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 같은 마음을 품는 것 부터가 꽤 드무니까요.
코미디의 얼굴을 하고 오는 진심
이 영화의 먹먹함은 뒤늦게 도착합니다. 보는 동안은 분명히 웃었는데, 다 보고 나면 웃었던 장면들이 다르게 기억됩니다. 저 사람들 사실 다 외로웠구나, 하고요. 울리려고 작정한 장면 하나 없이, 웃기던 리듬 그대로 가다가 슬쩍 마음을 건드리는 영화라서 더 그런 것 같습니다.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건 방향이 틀린 줄 알면서도 좋아한다고 말하던 얼굴들입니다. 좋아한다는 말은 원래 좀 우스운 채로 하게 되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장르만 로맨스> 포토
※ 참고 자료
- 영화 <장르만 로맨스> 공식 작품 정보
-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데이터베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