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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목련상가 옆 골목 구석에 떡볶이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들어가면 두루마리 휴지가 기둥에 매달려 있는게 보이고, 양옆에는 빨간 플라스틱 의자가 있었는데, 저는 앉지 않고 늘 가운데 서서 먹었습니다. 국민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가는 길에 꼭 들러서 떡볶이를 먹었습니다. 야채튀김 하나를 같이 시켜서 떡볶이 국물에 찍어 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근데 그 기억이 흔들렸습니다. 엄마랑 집에서 떡볶이를 해 먹다가 그 포장마차 얘기를 꺼냈더니 엄마가 그런 가게가 어딨었냐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목련상가 옆에는 야채가게랑 찐 옥수수 파는 아주머니만 있었다고요. 저보고 헷갈린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저는 매일 들렀던 곳인데요. 서서 먹던 자리까지 기억하는데요. 확인할 사진 한 장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30년이 넘었으니까요. 집에서 혼자 봤던 <버닝>을 보고는 그 기분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고 생각하다가 이 기억이 떠오른겁니다.

     

    영화 버닝 포스터
    ▲ 영화 <버닝> 공식 포스터

     

    스티븐 연을 따라 들어간 영화

    <버닝>을 고른 건 스티븐 연 때문이었습니다. <워킹데드>에서 오랫동안 봐온 얼굴이라 반가웠습니다. 그가 연기한 글렌이 사라진 뒤 드라마를 보면서 빈자리를 크게 느꼈을 만큼 좋아했던 배우였거든요. 과하지 않은데도 사람을 계속 보게 만드는 배우라는 인상도 남아 있었습니다.


    2018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유아인, 전종서, 스티븐 연이 출연한 미스터리 드라마입니다. 소설가를 꿈꾸며 아르바이트하는 종수는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았던 해미를 우연히 다시 만나고, 해미가 아프리카 여행에서 데려온 벤이라는 남자와 얽힙니다. 해미가 사라지고, 종수는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던 말을 떠올리며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해미가 사라진 뒤부터는 우물도, 고양이도, 벤의 비밀도 하나의 답으로 모이지 않습니다. 무언가를 보여주기는 하는데, 그것을 증거라고 불러도 되는지 영화는 끝까지 알려주지 않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포장마차, 해미가 기억하는 우물

    영화에서 제 포장마차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 건 해미의 우물 이야기였습니다. 해미는 어린 시절 우물에 빠졌고 종수가 자신을 구해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정작 종수는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해미의 가족과 동네 사람들은 우물 자체가 없었다고 하고요.


    그 우물 이야기에 제 포장마차 기억이 겹쳤습니다. 저는 분명히 서서 먹었던 기억이 있고, 휴지가 끈에 매달려 있었고, 야채튀김을 국물에 찍으면 빨간 게 손가락에 묻었습니다. 그런데 엄마의 기억 속에는 그 가게 자체가 없습니다. 두 사람이 같은 골목을 다른 눈으로 지나쳤던 건지, 아니면 제 기억이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건지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저는 해미가 거짓말했다고 쉽게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종수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해미의 기억까지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고 해미의 말이 사실이라고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제 포장마차 역시 엄마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없던 곳이 되지는 않지만, 제 기억만으로 실제 있었다고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영화는 고양이 보일을 두고도 비슷한 빈칸을 만듭니다. 종수는 해미의 집에서 고양이를 한 번도 보지 못하지만 사료는 줄고 배설물은 남아 있습니다. 훗날 벤의 집에서 만난 고양이는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합니다. 같은 고양이라고 의심할 만하지만, 그것만으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해미가 들려준 우물 이야기가 사실인지, 벤의 집에서 발견한 고양이가 정말 보일인지,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이 무엇을 뜻했는지. 아무도 답을 주지 않습니다.

     

    나는 왜 벤을 범인이라고 믿고 싶었을까

    스티븐 연이 연기한 벤은 대놓고 나쁜 사람이 아닙니다. 항상 웃고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며,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위협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그 친절함에는 따뜻한 느낌이 없습니다. 비닐하우스를 태운다는 말도 평범한 취미를 소개하듯 꺼내고, 그 말을 듣는 종수의 얼굴을 태연하게 바라봅니다. <워킹데드>에서 참 다정했던 메기의 남편이 낯설게 보였습니다.


    벤은 무슨 일을 하는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데도 모든 것을 가진 사람처럼 보입니다. 포르쉐와 강남의 집, 친구들과 여유로운 생활까지. 반면 종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아버지의 농장을 돌보며, 소설을 쓰고 싶지만 무슨 이야기를 써야 할지도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종수가 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해미를 걱정하는 마음만 있었던 게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좋아하는 사람 옆에 나타난 남자, 자신이 갖지 못한 것들을 너무 쉽게 누리는 남자를 향한 질투와 박탈감도 섞여 있었습니다.


    물론 벤을 의심할 만한 단서는 있습니다. 해미에게 건넸던 것과 닮은 분홍색 시계, 보일이라는 이름에 반응한 고양이, 그가 무심하게 꺼낸 비닐하우스 이야기까지. 저도 시계와 고양이가 나오는 순간에는 벤이 범인이라고 거의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되짚어보니, 저는 증거를 확인한 것이 아니라 종수와 함께 빈칸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벤이 수상해서 미워한 걸까요. 아니면 이미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모든 행동이 수상해 보였던 걸까요.


    <버닝>은 끝나도 아무것도 확인해주지 않습니다. 해미가 어떻게 됐는지, 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종수의 의심이 맞았는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제가 본 것이 사실인지, 종수가 믿는 것을 따라 본 것인지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답을 감춘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제가 너무 빨리 답을 정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목련상가 옆 포장마차도 그렇습니다.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엄마가 틀렸을 수도 있고, 제가 틀렸을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자기 기억이 맞다고 생각한 채로 30년 넘게 살아왔을 겁니다.


    그 포장마차가 정말 있었는지는 이제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제 기억 속에서 저는 늘 가운데 서 있었고, 야채튀김은 맛있었으며, 휴지는 끈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 기억 속에서는요. 기억은 이렇게 선명한데 사실이라고 증명할 길은 없다는 게, 지금도 조금 이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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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버닝>, <군체> 포토
    ※ 참고 자료

      - 영화 <버닝> 공식 작품 정보
      - 경기일보 이창동 감독 영화 ‘버닝’ 기자간담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