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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주의
9년 동안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했습니다. 오래 하다보니 상대가 지금 화가 났는지, 설명이 더 필요한지, 어떤 대답을 기대하는지를 표정과 목소리만으로도 알 수 있겠더라구요.
참 이상한 게 남의 기분을 읽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는데 반대로 내 상태는 뒤로 미뤄버립니다. 하루가 끝날 때마다 표정이 굳어 있고 아무 말도 하기 싫어졌는데도, 저는 그저 일을 잘해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장 내부 인간관계에서까지 지쳐가면서 번아웃이 왔다고 느낄 때쯤에야 겨우 그만뒀습니다. ‘나는 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은가’라는 가장 가까운 질문을 끝까지 뒤로 미뤘던 겁니다.
영화 〈관상〉을 보고 나서 그때의 일이 생각나더군요.

남의 얼굴을 읽는 사람
한재림 감독의 2013년 영화 〈관상〉에는 조선 최고의 관상가 내경이 등장합니다. 송강호가 연기한 내경은 얼굴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정과 운명을 읽어내는 인물입니다. 그는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역모의 기운을 알아보고, 자신의 능력으로 역사의 흐름까지 바꾸려 합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내경이 끝내 읽지 못한 얼굴이 아들 진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의 운명은 다 보면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 것. 그게 이 영화의 가장 큰 비극처럼 보였습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나니 내경이 놓친 얼굴은 아들 하나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얼굴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역모를 읽고, 김종서의 상에서 죽음을 읽고, 왕의 얼굴에서 남은 시간을 읽어내지만 정작 자기 관상은 읽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얼굴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 거울은 안 보는거죠.
저는 여기서 말하는 ‘자기 얼굴’이란게 실제 이목구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경은 자신을 사람의 운명을 읽는 관찰자이지만 어느 순간 권력 싸움 안으로 직접 들어갑니다. 수양의 관상을 정확히 보는 것과 역사의 방향까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그가 보지 못한 것은 자신의 나쁜 관상이 아니라, 관찰자에서 참여자로 변해가던 자기 모습이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동료의 표정이 어둡다는 건 바로 알았고, 상대방의 목소리가 높아지려는 것도 미리 감지했습니다. 그런데 내 얼굴이 언제부터 굳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퇴근길 지하철 유리에 비친 웃음기 하나 없던 표정을 보고 처음 알아차렸을 만큼요. 그때의 얼굴은 제가 알고 있던 제 얼굴과 조금 달랐습니다.
남들의 상태는 빠르게 판단하면서, 나는 계속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버틸 수 있는지와 버텨야 하는지를 구분도 못한 채로요.
읽어도 지킬 수 없는 얼굴
내경이 진형의 관상을 몰랐을까요, 저는 알았을 거라고 봅니다. 모르는 편이 낫다고 판단한 건지, 아니면 정말 눈이 멀었던 건지. 영화에선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중요한 건 알았다 해도 막을 수 있었을지를 더 생각하게 된다는 겁니다.
관상을 업으로 삼은 사람에게 아들의 죽음은 자신의 능력이 닿지 못한 가장 잔인한 자리였을 겁니다. 얼굴을 읽어 위험을 알아내는 것과, 그 위험으로부터 사람을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니까요.
내경이 보지 못한 것은 아들의 얼굴이라기보단 한 사람의 얼굴만으로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양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본다고 해서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권력의 방향까지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 싸움에 들어간 대가는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돌아왔습니다.
시대의 얼굴
내경이 진짜 읽지 못한 건 시대의 얼굴이었습니다. 수양대군의 얼굴에서 역모를 읽었어도, 그것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시대의 흐름이라는 건 몰랐던거죠.
영화 후반 내경은 자신이 본 것은 물결이었을 뿐, 그 물결을 일으킨 바람은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정확히 읽었지만, 그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욕망과 권력, 시대의 흐름까지는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개인의 운명은 정말 그 사람의 얼굴에만 새겨져 있을까요. 아니면 그가 살아가는 흐름속에서 뒤섞여 만들어지는 걸까요. 내경은 그 질문의 답을 가장 비싼 값을 치르고 알았습니다.
자기 얼굴, 아들의 얼굴, 그리고 자신이 미처 보지 못한 더 큰 흐름. 시대의 얼굴. 처음 영화를 볼 때는 이 순서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이야기로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지 〈관상〉은 남의 얼굴을 누구보다 잘 읽었던 사람이 자기 자신을 가장 늦게 알아보는 이야기였습니다. 내경은 수양의 얼굴을 잘못 본 것이 아닙니다. 얼굴 하나를 읽는 능력으로 세상의 방향까지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의 얼굴. 그걸 보지 못했던 겁니다.
9년 만에 그만뒀을 때 저도 비슷했습니다.
가장 나중에 안 건 내 얼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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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관상> 포토, 넷플릭스 코리아
※ 참고 자료: 영화 <관상> 공식 작품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