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무엇을 바꾸겠냐는 질문을 가끔 받습니다. 저는 바로 대답하지 못합니다. 바꾸고 싶은게 없어서가 아니라, 바꾸고 나면 지금 현재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망설임이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알약 열 개의 무게
2016년 개봉한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는 홍지영 감독 작품으로,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합니다. 소아외과 의사 수현은 캄보디아 의료 봉사 중 노인에게 알약 열 개를 받습니다. 삼키면 과거로 돌아간다는, 황당한 조건의 선물이요.
수현은 그 알약으로 30년 전 자신을 만나러 갑니다. 오래전 세상을 떠난 연아를 단 한 번만 다시 보고 싶어서요. 그러나 젊은 수현과 마주치면서 ‘한 번 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었던 시간여행은 연아의 죽음을 막는 문제로 커집니다.
줄거리는 여기까지면 충분합니다. 이 영화가 실제로 던지는 질문은 "과거로 돌아가면 뭘 바꾸겠어?"가 아니라 "바꿀 수 있겠어?"에 더 가까우니까요. 저는 이 차이가 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바꿀 수 있겠어, 라는 질문
시간여행 소재의 영화들은 대개 후회한 선택을 되돌리는 방향으로 흘러가잖아요. 그게 이야기의 동력이고요. 그런데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자꾸 다른 생각이 끼어들었습니다.
수현이 과거로 돌아가 연아를 붙잡는 데 성공한다면, 지금의 수현은 어디로 가는 걸까. 수십 년을 살아오면서 만들어진 관계들, 쌓아온 것들, 지금 이 자리가 통째로 사라지는 건 아닐까. 설령 그게 더 나은 삶이라 해도 그 자리에 있는 건 지금의 내가 아닌 거자나요.
영화를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의 어떤 하나를 바꾸면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바뀝니다. 직업이 달라질 수도 있고, 살아온 방식이 달라지면 지금 알고 지내는 사람들과는 아마 만날 일도 없었을 거예요. 힘들었던 순간들, 고생했던 일들도 다 내 안에 있는 건데 그것도 없어지는 거고요. 그러면 그 사람은 나일까요. 생김새만 같은 딴사람인 거지, 내가 아닌 거 아닐까요.
과거를 바꾸고 싶은 마음과 지금의 나를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이 동시에 있습니다. 이 두 감정이 충돌하면서요.
수현에게는 이 질문이 생각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연아를 살리면 현재의 딸 수아가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연아를 살리고 싶다는 마음도 진심이고, 이미 살아 있는 수아를 잃을 수 없다는 마음도 진심입니다. 둘 다 포기할 수 없어서 움직이지 못합니다.
과거의 나는 설득이 될까
이 영화의 타임슬립 설정이 다른 영화들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보통의 시간여행 영화는 주인공이 과거로 가서 그때의 자기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과거와 현재가 하나로 합쳐지는 방식이에요. 그런데 수현은 지금의 몸 그대로 과거로 갑니다. 그리고 거기서 30년 전의 자기 자신을 만납니다. 둘이 같은 시간 위에 나란히 존재해요.
처음 이 설정을 봤을 때 좀 낯설었는데, 보다 보니 오히려 이게 더 정직한 것 같았습니다.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는 실제로 다른 사람이니까요. 같은 얼굴이지만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아는 것도 다르고, 두려워하는 것도 다릅니다.
그러니까 영화에서 현재의 수현이 가장 애를 먹는 건 시간 이동 자체가 아닙니다. 30년 전의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일입니다.
현재의 수현이 연아를 살리는 일을 망설이는 이유로 수아를 말해도 젊은 수현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젊은 수현에게 수아는 얼굴도 모르는 미래의 사람이니 그럴 수 밖에요. 반대로 현재의 수현에게는 수아가 이미 함께 살아온 딸이고, 연아는 아무리 그리워도 오래전에 떠나보낸 사람입니다. 한쪽에는 연아가 현실이고, 다른 한쪽에는 수아가 현실입니다. 둘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당연합니다.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하는 일. 그때 그 선택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알기 때문에 해주는 말인데. 과거의 나는 나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집스럽게 듣지 않을 거예요. 저라면 미래에서 왔다는 사람이 아무리 증거를 들이밀어도, 스물몇 살의 저는 제 방식대로 했을 거예요. 그땐 그게 맞는 줄 알았을 테니까요.
수현도 결국 그 벽에 부딪힙니다. 과거를 되돌리는 일보다 과거의 자신을 이해시키는 일이 더 어렵다는 걸, 영화는 그 장면에서 조용히 보여줍니다.
모두를 살리는 결말 앞에서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어바웃 타임>이 몇 번 겹쳐 보였습니다. 두 작품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되돌리지만, 시간을 대하는 태도는 다릅니다. <어바웃 타임>의 팀은 결국 되돌아갈 필요가 없도록 오늘을 살아가는 쪽을 선택합니다. 반면 수현은 과거로 돌아가 이미 벌어진 일을 바꾸려 합니다.
다만 수현이 현재를 버리고 과거에 매달리는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는 연아를 살리면서도 수아를 지우지 않을 방법을 찾으려 합니다. 과거와 현재 가운데 하나를 고르는 대신, 어떻게든 둘 다 붙잡으려는 사람이지요.
영화는 마지막에 수현의 오랜 친구 태호가 남은 알약 한 개를 사용해 젊은 수현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경고하면서 연아와 수아뿐 아니라 수현까지 살려냅니다. 누군가를 구하려면 다른 누군가를 잃어야 한다는 잔인한 답 대신, 모두가 살아남는 판타지를 선택한 셈입니다.
영화가 끝까지 한 사람을 선택하게 했다면 수현이 어떤 결정을 내렸을지, 그리고 그 선택 이후에도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을지가 궁금합니다. 그래도 저는 영화가 내놓은 해답보다도 두 수현이 서로를 설득하지 못하던 시간이 더 오래 남았습니다.
지금의 저는 <어바웃 타임>의 팀처럼 오늘을 사는 쪽에 조금 더 가깝습니다. 과거의 한 장면을 고치는 대신, 그 장면까지 지나온 지금의 나를 그대로 두는 쪽이요. 그렇다고 수현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평범하게 흘려보냈던 하루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누구라도 알약 하나쯤은 손에 쥐고 오래 망설일 것 같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한동안 알약 열 개짜리 선택을 혼자 해봤습니다.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거기서 무엇을 바꿀 것인지, 그러면 지금의 무엇이 없어지는지… 계산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 제대로 계산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과거를 바꾸기 전에는, 그 선택과 함께 무엇이 사라질지 알 수 없으니까요.
▶ 함께 보면 좋은 글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도
결국 평범한 하루가 가장 소중하다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어바웃타임>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공식 작품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