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72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리뷰|파이는 왜 호랑이를 먹여 살렸을까 마음이 참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던 때였습니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를 둔 외벌이 아빠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대출 빚이 남아 있던 터라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근해야 했습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었고, 결국 저도 회사를 나오게 됐습니다. 갑자기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저는 우선 바로 할 수 있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오토바이를 몰 수는 없고, 자전거도 없어서 일단 도보로 시작했습니다. 무작정 걸어다니며 배달을 하니, 첫날에는 겨우 세 건을 하고도 온몸이 녹초가 되었습니다. 조금씩 건수를 늘려갔지만 취업 준비와 병행하니 벌이는 기대만큼 되지.. 2026. 9. 7.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리뷰|내 선택은 ‘다정한 먼지’ 감기에 심하게 걸린 채 출근한 날이 있었습니다. 하필 회사 일이 바빠 조퇴할 수도 없었습니다. 약을 먹으며 버텼고, 다른 사람에게 감기를 옮길까 봐 점심도 혼자 서둘러 먹고 자리로 돌아왔습니다.얼마 뒤 옆자리 동료가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내밀었습니다. 점심을 먹고 카페에 갔다가 제 생각이 나서 샀다고 했습니다.유자차 한 잔을 마신다고 감기가 낫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은 일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금 힘이 났습니다. 아픈 몸으로 혼자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군가는 제 상태를 보고 있었던 겁니다. 덕분에 저는 그날 남은 일을 마치고 정시에 퇴근할 수 있었습니다.벌써 5년도 지난 일이니 그 동료는 기억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잊을 수 없습니다. 유자차의 맛보다 카.. 2026. 9. 4. 넷플릭스 드라마 <들쥐> 리뷰|제문재가 가장 두려워한 것 어릴 때 제가 살던 동네에는 매주 수요일마다 뻥튀기 장수 아저씨가 찾아왔습니다. 그날만 되면 저는 뻥튀기를 먹자고 엄마를 졸랐고, 엄마는 쌀 한 바가지를 들고 나가셨다가 제 몸통만 한 뻥튀기 봉지를 안고 돌아오셨습니다. 파란 트럭이 골목에 들어오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지금도 그 모습이 선명합니다. 그런데 동생은 그 트럭이 흰색이었다고 합니다.이상한 것은 둘 다 자기 기억이 아주 선명하다는 겁니다. 저도 파란색이 분명하다고 생각하고, 동생도 흰색을 확실히 기억합니다. 확인할 사진도 남아 있지 않아 이제는 누구의 기억이 맞는지 알 수 없습니다.누군가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둘 중 한 사람, 어쩌면 두 사람 모두 실제와 다른 장면을 기억하고 있는 겁니다.그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알았습니다. 기.. 2026. 9. 1. 영화 <그린 북> 리뷰|두 사람 모두 가난했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저는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용돈도 직접 벌어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학교 밖에서 뭔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그런데 엄마 생각은 달랐습니다.“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 받는 게 낫지.”그래서 1학년 첫 학기에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엄마는 아주 좋아하셨습니다.저도 기뻤지만 이상하게 답답했습니다. 그냥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시험 보고, 성적을 받는 게 고등학생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결국 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손님을 상대하고, 사장님 눈치를 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친절하게 말했는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의외로 따뜻한 사람도 만났습니.. 2026. 8. 29. 영화 <퍼펙트 데이즈> 리뷰|카메라 밖에도 히라야마는 많았다 ※ 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변기를 닦는 장면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절대 편안하지 않거든요. 더러워진 변기의 모습과 냄새를 잘 아니까요. 영화 의 히라야마는 작은 거울을 변기 아래로 밀어 넣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확인합니다. 얼룩이 남지 않도록 몇 번이고 닦고, 다음 화장실에서도 똑같은 동작을 반복합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조금 우스워졌습니다. 남이 매일 변기를 닦는 모습에서는 평온함을 느끼면서, 정작 제가 매일 반복하는 설거지와 문서 작업, 출퇴근은 지긋지긋했으니까요.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인데 히라야마의 반복에는 리듬이 보였고, 제 반복에서는 피로만 느껴졌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변기를.. 2026. 8. 26. 영화 <소공녀> 리뷰|우리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불행한 표정을 기대할까 야식이 당기는 늦은 밤에도, 대낮에도 자주 가는 동네 24시간 맥도날드에는 늘 같은 자리에 백발의 할머니가 한 분 계십니다. 손에 들린 책 한 권, 뭘 드시진 않지만 항상 평온하고 여유로운 표정으로 앉아 계십니다.그분의 사정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같은 자리에서 오랜 시간 머무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면서 저는 어느 순간 돌아갈 집이 없는 분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짐작 위에 제 마음대로 이야기를 하나씩 덧붙이고 있었습니다.그러다 문득 제 자신을 돌아봤습니다. 저는 은연중에 그분에게서 초라함이나 우울함 같은 '불행의 증거'를 찾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요. 타인의 가난이나 결핍을 볼 때, 우리는 왜 그들이 마땅히 불행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고 기대하는 걸까요. 나는 그분의 사정을 멋대로 쓰고 .. 2026. 8. 24. 넷플릭스 애니메이션 <레오> 리뷰|특별하다는 거짓말, 특별하지 않아도 된다는 진실 포스터만 봤을 때는 그냥 귀여운 도마뱀이 나와서 아이들과 장난 치고 사고 치는 흔한 애니메이션인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초반엔 그런 장면들이 있습니다. 탈출을 꿈꾸는 늙은 도마뱀이 우당탕탕 사고를 치는 장면들이요. 하지만 늙은 도마뱀 레오가 아이들의 비밀을 들어주며 건네는 위로는 생각보다 훨씬 깊고 뭉클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제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툭 튀어나왔습니다. 어릴 적 성적표가 나오는 날이면 집에 들어가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쏟아질 잔소리가 눈에 선했으니까요. 하지만 할머니 댁으로 피신(?)을 가면 늘 마음이 푹 놓였습니다. 잘했든 못했든 그저 묵묵히 “그랬냐” 하시면서 끝까지 제 푸념을 들어주셨거든요. 그러시곤 주머니에서 슬그머.. 2026. 8. 22. 영화 <줄리 & 줄리아> 리뷰|줄리아를 다시 불러낸 줄리, 그다음에 선 나 저는 요즘 영화를 예전처럼 편하게 보지 못합니다.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써야 재미있을까’, ‘다른 리뷰와 무엇이 달라야 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블로그인데 어느 순간 영화가 감상보다 글감에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줄리 & 줄리아〉를 보면서 오래된 작품을 다시 보고 글로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요리와 글쓰기가 두 여성의 삶을 바꾸는 영화인데, 보고 나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도 연결돼 보였습니다.※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줄리아의 책이 줄리의 하루를 바꿨다2002년 뉴욕에서 민원 업무를 처리하던 줄리 파웰은 반복되는 직장 생활과 이루지 못한 작가의 꿈에 지쳐 있습니다. 잘나.. 2026. 8. 19.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 리뷰|우리가 삶을 미루는 두 가지 방식 은 시작 전부터 귀를 기울여볼 만합니다. 디즈니 로고와 함께 익숙한 팡파르가 나오는데, 평소와 달리 어딘가 삐걱거리고 서툽니다. 실수가 아닙니다. 제작진이 일부러 서툴게 연주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뒤이어 학생들의 서툰 연주가 이어지고 조 가드너의 중학교 음악수업이 시작됩니다. 웅장하게 들려야 할 디즈니 팡파르부터 중학교 밴드의 소리처럼 만들어버린 셈인데요. 이 시작이 과 꽤 잘 어울렸습니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삶도 완벽하게 준비된 뒤 시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저는 의 22였던 적이 있습니다. 사무직에서 현장직으로 이직을 결심했을 때인데요. 이 회사는 이래서 힘들 것 같고, 저 회사는 저래서 아닌 것 같고. 모르는 .. 2026. 8. 17. 넷플릭스 영화 <84제곱미터> 리뷰|살기 위해 산 집인데 최근 하락장에 꽤 많은 금액이 물려있어서 주식을 손절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손절을 못한다기보단 안하고 다시 올라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고 봐야 맞을 것 같습니다. 지금 팔아버리면 손실이 눈앞의 숫자로 확정되니까요. 물린 돈도 돈이지만 그보다도 이 종목을 붙잡고 버틴 시간도 너무 아깝습니다. 버티면 버틸수록 더 아까워지지만 그래서 더 못 팝니다. 영화 를 보면서 그게 영끌한 아파트라면 얼마나 더 놓기 어려울까 싶어 마음이 아렸습니다.※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살기 위해 산 집인데살기 위해 산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우성은 그 집을 위해 살고 있었습니다. 대출 이자를 갚기 위해 야근을 하고, 생활비도 줄이고, 관리비를 아끼기 위해 이웃과 .. 2026. 8. 15. 넷플릭스 드라마 <마스크걸> 리뷰|진짜 김모미는 어디에도 없었다 익명 게시판에는 실명으로는 절대 못 쓸 말들이 올라옵니다. 누가 썼는지 다 드러나는 곳에서는 하지 못하는 말이 술술 잘 나오지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하면 이상한 지점이 있습니다. 익명 게시판의 저와 실명의 저 중에 어느 쪽이 진짜 저일까요? 솔직히 확신이 잘 안 섭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을 보면서 이 질문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회사원 김모미, 마스크걸, 그리고 아름이 드라마를 보는 동안 저는 계속 질문 하나를 붙잡고 있었습니다. 이 여러 모습 중에 어느 게 진짜 모미일까. 낮의 회사원 모미가 진짜이고 마스크걸은 가면일까요. 아니면 마스크를 썼을 때 나온 솔직한 욕망이 진짜이고 회사원 모미가 가면이었을까요. 어릴 때부터 사람들.. 2026. 8. 13. 드라마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부장 이야기> 리뷰|평생 남의 좌표로 살았던 사람 한동안 저는 소위 안정적인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회사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니는 곳이 좋은 직장이라고 생각하면서 다녔습니다. 오래 다닐 수 있고, 매달 월급도 잘 나오고, 부모님도 좋아하시고. 그런데 막상 그 안에서 오래 있을수록 제가 원하는 삶과는 많은 것이 다르다는 걸 점점 느끼게 됐습니다. 주변에서도 굳이 왜 그만두느냐고 할 만한 자리였지만 안정적이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하고 보니 이상한 질문이 생겼습니다. 남들이 보기 좋은 선택이 아니면 어떤 기준으로 다음을 정해야 할까. 예전에는 '안정적인가'가 먼저였다면 이제는 뭘 봐야 할지 오히려 혼란스러웠습니다. 갑자기 '나에게 맞는가'를 보고 선택을 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JTBC.. 2026. 8. 11.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