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이 참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구조조정이 시작되면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회사를 떠나던 때였습니다. 그중에는 어린아이를 둔 외벌이 아빠도 있었습니다. 저 역시 대출 빚이 남아 있던 터라 하루하루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출근해야 했습니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넣어봤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었고, 결국 저도 회사를 나오게 됐습니다. 갑자기 망망대해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어디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저는 우선 바로 할 수 있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오토바이를 몰 수는 없고, 자전거도 없어서 일단 도보로 시작했습니다. 무작정 걸어다니며 배달을 하니, 첫날에는 겨우 세 건을 하고도 온몸이 녹초가 되었습니다. 조금씩 건수를 늘려갔지만 취업 준비와 병행하니 벌이는 기대만큼 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일부러 쉬지 않았습니다. 출근할 곳이 없어도 새벽에 일찍 일어났고, 이력서를 넣고, 틈틈이 배달을 했습니다. 몸까지 아프면 더 무너질 것 같아 운동도 챙겼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가만히 있으면 불안한 생각만 커질 것 같았습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를 보니 막막했던 그 때가 생각났습니다.
※ 본 포스팅은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비극과 ‘동물 이야기’라는 방어막
영화 후반부, 파이는 구출된 뒤 병원에서 조사관들에게 두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구명보트에는 다친 얼룩말과 하이에나, 오랑우탄, 벵골 호랑이가 함께 타고 있었고, 동물들이 서로를 공격하는 첫 번째 이야기. 그리고 파이와 어머니, 다친 선원, 주방장이 서로를 죽이고 식인까지 저질렀다는 잔혹한 두 번째 이야기.
16세 소년이 겪은 현실은 감당하기엔 너무나 끔찍했을 겁니다. 배가 침몰하며 아버지와 형을 잃고, 눈앞에서 어머니까지 살해당했습니다. 파이 자신도 주방장을 죽이고 그가 선원에게 했던 것과 같은 일을 합니다.
그래서 파이는 온전한 정신을 유지하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한 심리적 방어막으로 동물 이야기로 바꿔놓았던 겁니다. ‘내가 주방장을 죽였다’는 기억은 ‘리처드 파커가 하이에나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그렇게 해서 존엄성을 잃지 않고 절망도 버텨낼 수 있었습니다.
나를 무너뜨릴 수도, 살릴 수도 있는 본능
두려워하고 슬퍼하는 파이는 구명보트 위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을 죽이고 무엇이든 먹으면서 살아남은 파이는 뱅골 호랑이 ‘리처드 파커’가 됩니다. 그렇게 본다면 호랑이는 파이가 자신에게서 떼어놓은 가장 잔혹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채식주의자이자 경건한 신앙인이었던 파이는 살기 위해 생선의 목을 꺾고 거북이의 피를 마셔야 했습니다. 그것은 파이 스스로 가장 거부하고 싶었던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파이는 그 호랑이를 죽이거나 바다로 던져버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물과 고기를 구해주며 계속 먹여 살립니다. 그 생존 본능을 버리면 자포자기해서 죽을 것 같고, 그렇다고 본능에 완전히 먹히면 인간으로서의 자아를 잃기 때문입니다. 파이는 그 두려운 본능과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길들였습니다. 자신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을 살아남게 하는 힘을 인정하고 끝까지 안고 간 것입니다.
사실보다 의미를 선택하는 삶
멕시코 해안에 도착한 리처드 파커는 숲 앞에서 잠시 멈춥니다. 파이는 호랑이가 한 번쯤 자신을 돌아봐주기를 기다리지만, 파커는 그대로 숲속으로 사라집니다.
파이는 제대로 된 작별 인사를 하지 못했다며 모래 위에 쓰러져 웁니다. 함께 죽을 고비를 넘기며 바다를 건너온 존재가 떠났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이제 다시 순수한 인간으로 돌아왔다는 안도와 허탈이 한꺼번에 밀려왔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물론 제가 겪은 실직을 파이의 마주한 비극의 무게와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오늘 해야 할 일을 계속 만들었던 마음 만큼은 조금 알 것 같았습니다.
제가 했던 배달 아르바이트는 대출을 해결해주지도 않았고 다음 직장을 보장해주지도 않았습니다. 첫날에는 겨우 세 곳을 다녀왔을 뿐입니다. 그래도 그 세 건을 하는 동안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명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배달 앱에 뜬 주소를 보고 그곳까지 걸어가면 됐으니까요.
파이 역시 리처드 파커에게 물고기를 던져주며 그렇게 하루씩 건넜던 것 같습니다. 자신을 위협하는 호랑이였지만, 그 호랑이가 있었기 때문에 살아갈 이유와 할 일이 생겼던 겁니다.
그래서 미련 없이 사라지는 리처드 파커와 그 모습을 보며 엎드려 울던 파이의 모습이 유독 오랫동안 생각납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대하여
2013년 1월 1일 국내 개봉한 〈라이프 오브 파이〉는 이안 감독이 얀 마텔의 소설 《파이 이야기》를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수라즈 샤르마가 소년 파이를, 이르판 칸이 성인이 된 파이를 연기했습니다. 러닝타임은 126분이며 관람등급은 전체 관람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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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오토라는 남자>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공식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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