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저는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용돈도 직접 벌어보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학교 밖에서 뭔가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엄마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르바이트할 시간에 공부해서 장학금 받는 게 낫지.”
그래서 1학년 첫 학기에는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고 장학금도 받았습니다. 엄마는 아주 좋아하셨습니다.
저도 기뻤지만 이상하게 답답했습니다. 그냥 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시험 보고, 성적을 받는 게 고등학생 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습니다.
처음 보는 손님을 상대하고, 사장님 눈치를 보고,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친해지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했습니다. 친절하게 말했는데 화를 내는 사람도 있었고, 처음에는 어려웠는데 의외로 따뜻한 사람도 만났습니다.
제가 원하던 세상경험을 시작한겁니다.
영화 <그린 북>을 보면서 그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토니와 돈 셜리도 가진 것은 달랐지만, 각자 살아보지 못한 세계가 꽤 큰 사람들이었으니까요.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그린 북>은 어떤 영화일까?
2019년 1월 9일 국내 개봉한 <그린 북>은 피터 패럴리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장르의 영화입니다. 비고 모텐슨이 토니 발레롱가를, 마허샬라 알리가 피아니스트 돈 셜리를 연기했으며 러닝타임은 130분,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입니다.
실존 인물 돈 셜리와 토니 발레롱가의 1960년대 미국 남부 공연 여행을 바탕으로 했지만, 인물 관계와 일부 에피소드에는 영화적 각색이 들어갔습니다. 영화 제목인 ‘그린 북’은 당시 흑인 여행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숙박시설과 식당 등을 안내하던 실제 여행안내서에서 가져왔습니다.
1962년, 뉴욕 브롱크스에서 나이트클럽 일을 하던 토니는 돈 셜리의 운전기사 겸 수행원으로 고용돼 미국 남부 공연 투어를 함께 떠납니다. 성격도 생활방식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같은 차를 타고 몇 주 동안 남부를 돌아다니면서 서로가 알지 못했던 세계를 보게 됩니다.
사람들과 잘 어울리는 토니에게 부족했던 것
백인인 토니는 경제적으로 넉넉한 사람이 아닙니다. 일하던 클럽이 문을 닫으면 새로운 일을 구해야 했고, 돈 셜리의 운전기사도 생활비 때문에 하게 됩니다.
토니는 사람을 많이 만나며 살아온 사람입니다. 밤거리에서 일했고, 말도 잘하고, 어디서든 사람들과 금세 섞입니다. 그런데 그건 토니가 살아온 브롱크스의 이탈리아계 백인 공동체 안에서만 그랬습니다.
토니는 자신의 집에 왔던 흑인 수리공들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상대를 제대로 알기도 전에 이미 판단을 끝낸 겁니다.
자기와 다른 사람을 직접 겪어본 경험은 부족했던 거죠.
흑인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사람을 먼저 판단했던 토니를 보면서 저는 일종의 시선의 가난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토니는 만난 사람은 많았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은 생각보다 작았습니다.
화려한 집에 살던 셜리에게 없었던 것
흑인인 돈 셜리는 정반대입니다. 카네기홀 위 화려한 집에 살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입니다. 부와 교양을 갖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영화 속 셜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고립돼 있는 사람처럼 그려집니다. 토니에게는 너무 자연스러운 치킨을 손으로 집어 먹는 것도 낯설고, 토니가 흑인 대중음악을 이야기할 때도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생깁니다.
평범한 생활 속에 섞여 살아본 경험이 부족했던 겁니다.
토니에게는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야가 부족했고, 셜리에게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 밖의 일상이 낯설었습니다.
두 사람에겐 서로 다른 종류의 경험의 가난이 있었습니다.
같은 차에 타고 나서야 보인 것들
두 사람의 세계가 넓어지기 시작하는 곳이 좁은 자동차 안이라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토니는 셜리가 남부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 바로 옆에서 봅니다. 무대 위에서는 백인 관객들이 그의 연주에 박수를 보내지만, 공연이 끝나면 같은 식당에서 식사하는 것조차 거부당합니다.
‘인종차별이 있다’고 아는 것과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직접 그 일을 당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었을 겁니다.
셜리 역시 토니와 함께 먹고, 싸우고, 길 위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을 겪으며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았던 생활 속으로 들어갑니다.
서로를 가르친다기보단 서로에게 없던 세계를 보여준 셈입니다.
아르바이트를 하기 전의 저에게도 ‘손님’, ‘사장님’, ‘직장동료’라는 말은 이미 알고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런데 직접 만나고 부딪혀보니 그 단어들이 눈으로 보였고 몸으로 느껴졌습니다.
토니에게도 어느 순간부터 ‘흑인 피아니스트’보다 돈 셜리라는 사람이 먼저 보이기 시작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장학금으로는 배우지 못했던 것
지금 생각해도 엄마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부해서 장학금을 받는 것도 분명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실제로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도 있었죠.
그런데 그때의 저에게는 다른 공부가 더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보고, 돈을 받고 일해보고, 하기 싫은 일도 해보고, 처음 판단했던 사람을 다시 보기도 하는 공부요.
그건 강의실에서는 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린 북>의 두 사람도 뉴욕에 그대로 있었다면 서로를 평생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안전지대를 벗어나야 한다’는 거창한 말보다 오히려 단순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세상이 생각보다 크다는 것.
장학금은 제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걸 알려줬습니다.
아르바이트는 세상에는 내가 알지 못했던 사람과 방식이 아주 많다는 걸 알려줬습니다.
돌이켜보면 제 삶을 조금 더 넓혀준 건 역시 두 번째였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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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그린 북>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그린 북> 공식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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