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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두 시였습니다. 넷플릭스에서 뭐 볼지 십 분째 스크롤만 하다가 별 기대 없이 눌렀던 영화가 있습니다. '인턴'. 제목부터 너무 평범해서 그냥 자기 전에 가볍게 보고 끌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끄지 못했습니다. 70대 할아버지가 스타트업에 인턴으로 들어가서 벌어지는 이야기. 내용도 대충 알 것 같았고 감동도 있을 것 같았는데 예상한 것 보다 훨씬 깊은 여운이 남는 영화. 너무 빠져들어 봤네요. 그날 이후로 저는 이 영화를 세 번 더 봤습니다. 그리고 볼 때마다 다른 게 보였어요.

기다림 - 아무 일도 안 시키는데도 괜찮은 신입
벤 휘태커, 로버트 드니로가 연기한 이 노인은 출근 첫날부터 책상에 앉아만 있습니다. 둘째 날도, 셋째 날도 똑같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일을 주지 않아요.
저 같으면 못 버텼을 것 같습니다. 자존심도 상하고,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싶어서 사흘 만에 그만뒀을 거예요. 근데 벤은 그냥 앉아 있습니다. 조급해하지도, 불평하지도 않고요. 처음 봤을 땐 그게 답답했는데, 두 번째 봤을 땐 그게 부럽더라고요.
저는 뭐든 빨리 증명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편입니다. 새 직장에 들어가면 첫 주 안에 뭔가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감, 다들 한 번쯤 느껴보셨을 거예요. 근데 벤을 보면서 처음으로 "기다리는 것도 능력이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공감 - 줄스를 보면서 떠오른 내 모습
극중 CEO 줄스는 일 년 만에 회사를 급성장시킨 인물입니다. 누구보다 빠르고 완벽하려 하고, 그래서 벤 같은 느린 사람을 처음엔 불편해하죠. 저는 사실 이 캐릭터를 보면서 좀 찔렸습니다. 일도 잘하고 싶고 가족도 잘 챙기고 싶은데, 결국 둘 다 어설프게 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이 있잖아요. 줄스가 늦은 밤까지 사무실에 남아있는 장면, 남편과 점점 멀어지는 장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작년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일 욕심내다가 정작 중요한 사람들한테는 소홀했던 그 시기를요.
근데 벤은 줄스한테 충고 같은 거 안 합니다. 그냥 늦은 밤 옆에 조용히 앉아 있어요. 그 장면 하나가 어떤 긴 대사보다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진짜 위로는 말이 아니라 그냥 곁에 있어주는 거구나, 싶었어요.
여운 - 닮고 싶은 참 어른의 모습
영화 마지막에 줄스는 결국 외부 CEO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사를 지키기로 합니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벤은 단 한 번도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요. 그냥 옆에서 묵묵히 지켜봤을 뿐인데, 줄스는 스스로 답을 찾습니다.
영화 보고 나서 계속 생각났던 문장이 있습니다. 줄스는 일에서는 보스지만 인생에서는 아직 인턴이고, 벤은 인생에서는 보스지만 새로운 무대에서는 다시 인턴이라는 거요. 이 대비가 진짜 오래 머릿속에 남더라고요.
요즘 '꼰대'라는 말이 너무 흔하게 쓰이는데, 이 영화는 정반대의 어른을 보여줍니다. 아는 게 많아도 먼저 나서지 않고, 옳다고 생각해도 강요하지 않는 사람이요. 저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따라 하려니 진짜 어렵겠더라고요. 기다리는 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요즘 너무 정신없이 산다는 생각이 들면 이 영화를 한 번씩 다시 꺼내봅니다. 뭔가 거창한 깨달음을 얻으려는 건 아니고요, 그냥 벤 같은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좀 놓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