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맛있는 냄새가 났습니다. 겨울이었고, 유독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엄마가 어니언수프를 만들었다고 먹어보라고 하셨습니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맛있다는 생각보다 거의 다 먹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양이 너무 적었습니다.
"엥? 근데 왜 이렇게 적어요? 양을 좀 더 많이 하지…."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엄마가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양파가 부드러워지고 아주 진한 갈색이 될 때까지 3~40분을 불 앞에서 계속 저어줘야 하는데, 아주 천천히 익혀야 풍미가 좋고 깊은 맛이 나기 때문에 이 과정이 중요하다고. 그러고 나서 화이트와인을 넣고 은근히 끓여주고, 치즈를 넣고 또 끓여준 다음에 마지막에 소금과 후추로 간을 맞추는 것 까지 1시간이 걸렸다고. 게다가 엄마도 그날 레시피 찾아보고 처음 만들어보셨던 거라 양이 저렇게 적게 나올 줄 몰랐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고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고맙다는 말도, 맛있었다는 말도 순서가 이미 바뀐 뒤였습니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를 보다가 그날이 다시 생각났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팥소와 어니언수프, 보이지 않는 시간
도쿠에가 단팥소를 만드는 과정은 느립니다. 팥을 씻고 불리고, 여러 번 물을 갈아 떫은맛을 빼고, 낮은 불에서 오래 끓입니다. 그 옆에서 센타로는 당황합니다.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얼굴입니다.
도쿠에는 팥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고 말합니다.
도쿠에의 팥소가 맛있어서 사람들이 줄을 섭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저 팥소를 먹는 손님 중에 이게 얼마나 오래 끓인 건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사람들은 맛을 먹지, 시간을 먹지는 않으니까요.
그게 당연한 일이기도 합니다. 도쿠에도 그걸 모를 리 없습니다. 알면서도 팥을 불리고 오래 저어줍니다. 그런데도 팥을 불리고 기다리고 오래 저어줍니다.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도 같은 방식으로 합니다.
엄마의 어니언수프도 아마 그랬을 겁니다. 저한테 보여주려고 한시간을 저어준 건 아니었겠죠. 그냥 제대로 하는 방법이 그거니까. 제가 알든 모르든, 그 과정은 똑같이 1시간이었을 겁니다.
도쿠에가 오래 기다려온 것
도쿠에는 한센병 환자였습니다. 완치 판정을 받은 지 오래됐지만, 수십 년을 요양소에서 보냈습니다. 사회와 단절된 채로. 그 시간 동안 그녀가 붙들고 있었던 것 중 하나가 단팥소였습니다. 언젠가 자신의 팥소를 가게에서 써보는 것. 오래 품어온 꿈이었습니다.
센타로의 가게에서 그 꿈이 잠깐 이루어지는가 싶었습니다. 그런데 도쿠에가 한센병을 앓았다는 소문이 퍼지자 손님들이 끊기고, 결국 도쿠에는 가게를 떠납니다.
저는 도쿠에가 화를 쏟아내거나 자신이 얼마나 억울하게 살아왔는지를 길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 더 씁쓸했습니다.
그렇다고 영화가 도쿠에를 혼자 모든 것을 초월한 사람처럼 그리는 것도 아닙니다. 센타로와 와카나 역시 각자의 자리에서 조금씩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센타로는 꿈꾸던 삶에서 멀어져 빚 때문에 가게를 운영하고 있고, 와카나는 집과 학교 어디에서도 편하게 자기 자리를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세 사람이 가까워지는 방식도 요란하지 않습니다. 서로의 상처를 끈질기게 캐묻지 않습니다. 팥을 끓이고, 도라야키를 먹고,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조금씩 상대의 시간을 알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가 좋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번에 구원받는 사람도 없고, 갑자기 인생이 달라지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냥 가게 문을 열고, 팥을 끓이고, 사람을 다시 찾아가면서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 조금이 쌓이는 게 보여서 좋았습니다.
그날 밤과 지금
영화가 끝나고 한참 그 어니언수프 생각을 했습니다. 양이 왜 이렇게 적냐고 했던 그 말이 지금도 가끔 떠오릅니다. 딱히 크게 잘못한 것도 아닌데 그 말이 유독 오래 걸리는 이유를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조금 정리됐습니다.
공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먹을 때는 몰랐다가 나중에야 얼마나 오래 끓인 건지 알게 된 것처럼요. 도쿠에의 팥소도, 엄마의 어니언수프도 전부 그런 종류였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뭔가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여전히 저는 눈에 보이는 것 위주로 판단하는 사람입니다. 결과물만 보고 과정을 건너뛰는 사람. 그날 밤 엄마한테 한 말이 딱 그랬습니다.
그래도 집에 가면 엄마한테 그때 그 수프 이야기를 꺼내볼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또 만들어달라고 하지 않고, 제가 해보려 합니다. 양파를 40분 동안 직접 저어서 엄마에게 한 그릇 내놓고 싶습니다.
막상 만들고 나면 양은 엄마가 만들었던 것보다 더 적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어떤 영화일까?
2015년 9월 10일 국내 개봉한 <앙: 단팥 인생 이야기>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두리안 스케가와의 소설을 영화화한 113분의 드라마입니다. 키키 키린이 도쿠에, 나가세 마사토시가 센타로, 우치다 카라가 와카나를 연기했으며 국내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입니다. 2015년 제68회 칸국제영화제에서는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의 개막작으로 상영됐습니다.
빚을 갚기 위해 작은 도라야키 가게를 운영하는 센타로 앞에 일흔이 넘은 도쿠에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며 찾아옵니다. 센타로는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도쿠에가 만든 단팥소의 맛을 본 뒤 함께 일하기 시작하고, 두 사람의 만남은 서로의 삶을 조금씩 바꿔놓습니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이 작품에 끌린 이유 중 하나로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들’을 다룬다는 점을 꼽았습니다. 도쿠에가 자연과 팥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모습도 그런 감독의 시선과 맞닿아 있습니다.
※ 참고자료: The Berliner|가와세 나오미 감독 인터뷰 「Sweet Nature: Naomi Kaw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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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토스카나>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앙: 단팥 인생 이야기> 공식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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