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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저는 계획만 실컷 하고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것들이 꽤 많습니다. 분명히 해보고 싶었는데 이상하게 막상 시작하려고 하면 몸이 굳어버린 것처럼 움직이지 않더라고요. 책상 정리나 설거지, 청소기 돌리기 같은 간단한 일부터, 자격증 공부한다고 책만 사놓고 표지 한 번 안 넘겨봤다거나, 이직하고 싶다는 생각만 1년 넘게 하면서 이력서 한 줄 못 고친다거나. 신기한 건 그 와중에도 계획한 걸 다 해내고 나면 얼마나 뿌듯할지는 또 머릿속으로 실컷 그려봤다는 겁니다. 정작 손은 움직이지 않으면서 결과만 상상하고 있었던 거죠. 그렇게 시간만 보내고 나서 혼자 이불 속에서 '그때 그냥 할 걸' 하고 뒤척이는 그 밤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한동안 그런 밤들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2013년 개봉한 미국 영화입니다. 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동시에 맡아, 평범한 회사원 월터 미티가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여정을 담고 있습니다. 사실 10여 년 전 처음 봤을 땐 큰 감흥이 없었던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40대가 된 지금 다시 보니, 그때는 보이지 않던 현실적인 위로와 울림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느새 제 인생 영화 중 하나가 되어 있었고, 앞으로도 문득 삶이 막막해질 때마다 다시 꺼내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출처: 나무위키

     

    일상: 지루한 35분이 사실은 진짜 삶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초반이 지루하다고 합니다. 실제로 모험이 시작되기까지 꽤 긴 시간 동안 월터의 반복되는 일상이 펼쳐집니다. 그런데 저는 그 35분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가장 역할을 도맡아야 했던 월터가, 본인이 원하는 걸 조용히 내려놓고 16년을 버텨온 시간들.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무시당하고, 존재감도 없던 그 시간들이 사실은 월터의 삶 전체를 뒷받침해온 든든한 버팀목이었으니까요. 월터의 유일한 취미는 상상이었습니다. 영화 속에서는 이걸 '상상 멍 때리기'라고 부르는데, 표현이 참 절묘하다 싶었습니다. 무례한 상사한테 통쾌하게 한방 날리는 상상, 좋아하는 동료 셰릴 앞에서 멋진 영웅이 되는 상상. 현실의 월터는 데이팅 앱에서 윙크 버튼 하나 못 누르고 수십 번 망설이는 사람인데, 상상 속에서만큼은 뭐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엔 그게 조금 안타까웠는데, 계속 보다 보니 저도 별로 다르지 않더라고요. 하루에도 몇 번씩 이렇게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작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날들이 얼마나 많은지.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 훌쩍 떠나라는 영화인 줄 알았더니, 오히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버텨온 일상에 정작 삶의 의미가 있다고 말해주는 영화였습니다. 지루하다고 무시했지만, 그게 바로 진짜 삶이었던 겁니다.

     

    모험: 헬기에 뛰어들던 그 찰나

    영화의 전환점은 전설적인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보낸 표지 사진 필름이 사라지면서 시작됩니다. 잡지사는 폐간을 앞두고 있고, 사진을 찾지 못하면 월터는 직장을 잃게 됩니다. 그때서야 그는 처음으로 짐을 쌉니다. 그린란드 바다 위를 날던 헬기에 몸을 던지는 그 장면이 정말 압도적입니다. 평소 데이팅 앱 윙크 버튼 하나 못 누르던 사람이 망망대해 위 헬기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면서, 어딘가 짜릿하면서도 괜히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아프가니스탄으로 이어지는 여정의 풍경들이 정말 숨 막히게 아름다운데, 재밌는 건 모험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월터의 상상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는 겁니다. 눈앞의 현실이 상상보다 더 크고 생생해졌으니까요.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아이슬란드 화산 도로를 내달리는 장면은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렸습니다. 이 영화의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잘 다니던 회사 팽개치고 당장 모험을 떠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는 거라고요. 용감해서 떠나는 게 아니라, 더 이상 잃고 싶지 않아서 겨우 움직이게 된 사람. 그게 월터였고, 솔직히 우리 대부분의 모습이기도 하지 않나 싶습니다. 평소 용기 내지 못하고 망설이는 분들께 특히 권하고 싶은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표지: 아무도 몰랐지만, 누군가는 보고 있었다

    영화 마지막에 라이프지의 최종 표지가 공개됩니다. 그게 다름 아닌 월터 본인이 필름을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처음 그 장면을 봤을 때 울컥해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던 월터가, 본인이 원하는 것을 모두 포기한 채 해온 일. 더군다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던 업무. 항상 무시당하고 존재감 없던 월터가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해온 것. 그런 월터에게 보상이라도 해주듯, 잡지를 좌지우지하던 전설의 사진작가가 마지막 표지는 바로 그 사진이어야 한다고 못 박아뒀다는 것. 그 대목에서 심장이 조용히 내려앉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아도, 진짜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당신을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이 영화 안에 그렇게 조용히 담겨 있었습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혹은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더라도, 당신은 삶의 정수를 만들어가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참 뭉클합니다. 다들 그 마지막 표지 장면에서 어떤 감정이 올라왔는지 궁금하네요.묵묵히 버텨온 제 시간들도 언젠가는 누군가 알아봐 줄 거라는 작은 믿음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상상만 하지 말고, 하나씩 진짜로 해보려고 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0K-nnHCek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