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신 영화는 무서워서 못봅니다. 그런데 좀비 영화는 찾아서 봅니다. 부산행, 반도, 킹덤, 지금 우리 학교는까지 다 챙겨 봤습니다.
곰곰이 따져보니 이유가 있었습니다. 귀신은 어디서 튀어나올지 규칙이 없는데, 좀비한테는 규칙이 있습니다. 물리면 감염되고, 소리에 반응하고, 머리를 노리면 됩니다. 이걸 아니까 무서워도 견딜 만합니다. 그렇게 좀비물을 보다 보니 이제 좀비가 뛰어다니든 기어다니든 벽을 타든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군체>도 그런 마음으로 들어갔습니다. 연상호 감독 신작이라는 호기심 반, "그래도 좀비물이니 볼만 하겠지" 하는 마음 반. 전지현, 구교환, 지창욱이라는 라인업도 솔직히 배우 보러 가는 값은 하겠지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나고 극장 불이 켜졌을 때, 오랜만에 그 기분이 들었습니다. 와…이거 집에 가서도 계속 생각나겠는데?
※ 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실수까지 학습하는 좀비
감염자들은 하나가 겪은 경험과 기억을 무리 전체가 그대로 공유해 버립니다. 어디서 막혔는지, 어떤 방법으로 사람을 잡았는지를 전부 다 같이 알게 됩니다.
처음에는 ‘설정 신선하네?’ 하면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이 설정이 제가 좀비물을 편하게 봐온 근거를 정확히 부숩니다. 좀비의 규칙은 고정되어 있고 나는 예측할 수 있으니 무섭지는 않다. 그런데 말이죠, <군체>의 감염자들은 그 규칙을 자기들이 계속 다시 씁니다.
그러다 영화 중반쯤, 소름이 확 돋으면서 머릿속에 이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만약 저놈들이 실수까지 학습하면 어떡하지…?’
그 순간부터 극장 의자가 불편해졌습니다. 화면 속에 있는 게 좀비 떼로 안 보이고,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진화하는 하나의 생물로 보이기 시작했거든요. 실패할 때마다 강해지는 상대라는 건, 시간이 무조건 저쪽 편이라는 뜻입니다. 갑자기 무서워져서 몸이 움츠러들었습니다.
좀비물을 보다가 이만한 충격을 받은 건 워킹데드 이후 처음이었습니다. 어느 에피소드가 좀비들이 수군수군 말을 하는 장면에서 뚝- 끝나버려서, 그 주 내내 뒷목이 서늘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좀비 가죽을 뒤집어쓰고 무리에 섞여 사는 사람들, 알파와 베타가 이끄는 집단이었죠.
사람이었다는 게 밝혀지고 나서야 안심이 됐는데, <군체>는 반대 방향으로 사람을 쪼입니다. 백 마리가 한 몸처럼 배워나갑니다. 저한테는 이쪽 충격이 훨씬 컸습니다.
나중에 연상호 감독이 이 아이디어를 AI에서 출발시켰다는 인터뷰를 읽었습니다. 평소 AI의 구동 방식에 호기심이 많았고, 방대한 데이터로 보편성을 추구하는 AI를 보다가 거꾸로 휴머니즘과 개별성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됐다고 합니다. 핵심 모티브 가운데 하나는 뇌 오가노이드였다고 합니다. 사람의 줄기세포로 만든 작은 뇌 조직을 컴퓨팅에 활용하려는 연구가 실제로 진행 중이라는 사실에서 이야기를 구체화했다고요. 좀비 영화 한 편 보고 왔을 뿐인데 밤에 생체 컴퓨터 기사까지 찾아 읽게 됐습니다.
옆자리에서 새어 나온 탄식
영화 후반에 한 장면이 있습니다. 감염자 떼가 한 덩어리로, 거대한 개미떼처럼 움직이는 장면입니다. 앞에서는 왜 보여주나 싶었던 장면들이 이 순간에 하나씩 연결됩니다.
앞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장면들이 전부 이 순간을 위한 준비였다는 걸 알게 되는데, 그것보다도 거대한 감염자 무리가 화면을 채우는 모습 자체가 훨씬 더 강렬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처음 보는 분이 "와..." 하고 작게 소리를 냈는데, 저도 속으로 정확히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습니다. 모르는 사람과 감탄의 타이밍이 겹치는 경험은 극장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122분이면 꽤 긴 편인데 시계 한번 안봤습니다. 갑자기 튀어나와 놀래키는 식의 공포도, 시체 훼손을 전시하는 식의 잔인함도 거의 없이, 상황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긴장만으로 끝까지 끌고 갑니다. 숨 돌릴 틈을 주는 장면이 몇 개 있긴 한데, 그마저 뭔가 다음 위기를 준비하는 시간처럼 느껴져서 마음 편히 쉬어지지가 않았습니다.
무용수들도 꼭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감염자 떼를 연기한 배우들의 움직임이 리얼 소름이었습니다. 저게 사람 관절이 맞나 싶은 각도로 꺾이는데 그게 또 희한하게 자연스럽고, 여럿이 하나의 리듬으로 보입니다. 이 장면에서 <군체> 라는 제목이 나온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인터뷰를 찾아보고 그 움직임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연상호 감독이 이 장면들을 위해 현대무용 팀과 협업했다고 합니다. 여러 감염자가 하나처럼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기 위해 현대무용 팀과 협업했다고 합니다.
극장에서 제가 "저건 뭐지" 싶었던 그 기괴한 통일감이 무용수들의 몸에서 나온 거였습니다. 듣고 보니 그 움직임은 연기라기보다 안무에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구교환은 역시 구교환이었습니다. 서영철이라는 인물은 웃고 있는데도 불편하고, 가만히 서 있는데도 불안합니다. 무기도 없고 언성도 높이지 않는데, 이 사람이 화면에 있으면 저는 좀비 떼를 제쳐두고 이쪽이 더 경계됐습니다. 자기가 옳다고 완전히 믿어버린 사람의 얼굴이 어떤 것인지, 구교환이 웃을수록 저는 더 불안해졌습니다.
흐지부지 접힌 이야기 하나
아쉬운 구석도 있습니다. 학교폭력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 구도가 나오는데, 중반까지는 이 관계가 뭔가 의미 있는 곳으로 갈 것처럼 굴다가 결국 흐지부지 접힙니다. 어, 뭔가 더 있을 줄 알았는데, 하는 느낌이 끝까지 해소가 안 됐습니다.
영화가 말하려는 ‘개인이 집단에 휩쓸리는 과정’과도 연결될 수 있어서 조금 더 보여줬으면 싶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아니면 차라리 그 분량을 다른 인물들에게 나눠줬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습니다.
빌딩 밖 연구소와 정부 쪽 이야기도 병행되는데요. 하고 싶은 말이 많다 보니 클라이맥스까지는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봤는데, 결말에서 갑자기 정리 버튼을 누른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자, 다들 수고하셨고 빨리 마무리합시다, 하는 속도랄까요.
그래도 극장을 나서며 계속 생각했던 건 감염자들의 소통방식 이었습니다. 오해와 어긋남 없이 그냥 하나가 알면 순식간에 전체가 완벽하게 알게되는 세계. 영화는 그 연결이 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때 얼마나 무서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집에 오는 길에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그 답답함, 분명히 말했는데 다르게 알아듣고, 같은 걸 보고도 딴소리를 하는 그 어긋남이 실은 인간을 지켜주는 빈틈이었네 하고요. 누군가와 말이 안 통해 속이 터질 때면 그 좀비 떼를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화가 조금 덜 날 겁니다. 완벽하게 통하는 쪽이 어떤 모습인지 이미 봐버렸으니까요.
<군체>는 어떤 영화일까?
2026년 5월 21일 개봉한 <군체>는 서울 도심의 초고층 건물에서 벌어진 집단 감염 사태를 그린 액션 스릴러입니다. 건물이 봉쇄되자 생명공학자 권세정과 생존자들은 서로의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며 빠르게 진화하는 감염자들과 맞서게 됩니다. <부산행>과 <반도>의 연상호 감독이 연출하고 최규석 작가와 함께 각본을 썼으며, 러닝타임은 122분, 관람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전지현이 생명공학자 권세정을, 구교환이 연구원 서영철을 연기했으며 지창욱·신현빈·김신록·고수 등이 출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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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군체>, <미키17> 포토
※ 참고자료
- 영화 <군체> 공식 작품 정보
- 연상호 감독 인터뷰, 케이스타뉴스, 씨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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