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규는 전생에 세종이었나 싶었습니다. 2011년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세종을 연기했으니 익숙하게 느껴지는 게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이번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에서도 한석규 캐스팅이 찰떡이다 싶을 정도로 이질감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두 세종은 같은 얼굴을 하고도 조금 달랐습니다.
위대한 왕의 이야기를 기대하고 갔는데, 영화가 보여준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누구보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 정작 자신이 원하는 사람 하나 마음대로 곁에 둘 수 없었던 사람의 이야기였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왕의 욕설이 서럽게 들린 이유
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남은 장면은 세종이 대신들과 맞서며 분노를 터뜨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야, 이 개새끼야!”
반듯한 세종대왕의 입에서 나온 욕설이라 놀란 게 아니었습니다. 백성을 위해 조선의 시간과 문자를 만들려 했지만 사대의 질서와 조정의 반대에 계속 가로막힌 사람의 분노가 그 한마디 안에 다 들어 있었습니다.
화를 내는 장면인에도 저는 서러웠습니다. 한석규는 목소리만 높이는 대신, 오랜기간 억눌러온 울분이 한순간에 터지는 것처럼 연기합니다. 거친 말보다 그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던 세종의 외로움이 먼저 보였습니다.
왕이면 누구보다 많은 것을 가질 수 있을 것 같지만, 영화 속 세종에게 그 자리는 오히려 더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자리였습니다.
장영실을 아끼는 마음을 드러낼수록 신하들의 의심은 커지고, 조선만의 시간과 하늘을 만들겠다는 꿈을 밀어붙일수록 명나라와의 관계까지 흔들립니다. 왕관이 세종에게 힘을 주는 동시에 손발을 묶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알아볼수록 더 외로워지는 눈
영화를 보는 동안 세종의 눈이 자꾸 보였습니다. 외로움이 담긴 눈빛이기도 했고, 장영실의 재능을 알아본 사람의 눈이기도 했습니다.
장영실이 뛰어난 과학자였다는 사실은 어려서부터 배워서 알고있지만, 그 재능을 처음 알아보고 반대를 견디며 자리를 만들어준 사람, 세종. 두 사람을 왕과 신하로만 보는 건 이 영화의 많은 장면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특히 세종과 장영실이 근정전 앞에 나란히 누워 별을 바라보는 장면이 그렇습니다. 왕은 높은 곳에 앉고 신하는 아래에서 고개를 숙여야 하는 시대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두 사람이 같은 높이에서 같은 방향을 바라봅니다.
원래는 두 사람이 걸으며 하늘을 보는 설정이었지만, 한석규의 제안과 논의를 거쳐 바닥에 눕는 장면으로 바뀌었습니다. 허진호 감독은 왕이 눕는다는 설정이 파격적이지만, 세종이 장영실을 바라보는 시선을 보여주기에 좋은 장면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저는 이 장면이 두 사람의 관계를 가장 간단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분은 달랐지만 같은 하늘을 볼 줄 아는 동료였습니다. 세종이 꿈꾼 조선의 하늘을 실제 기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사람이 장영실이었고, 장영실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 능력을 펼칠 자리를 마련해준 사람이 세종이었습니다.
사람을 정확하게 알아볼수록, 그 사람을 잃는 일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세종은 장영실이 어떤 사람인지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에, 결국 그를 곁에 둘 수 없게 되는 순간의 무게도 더 크게 느껴졌을 겁니다.
한석규가 8년 만에 다르게 이해한 세종
한석규는 〈뿌리깊은 나무〉 이후 8년 만에 다시 세종을 연기했습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앞선 세종을 '사람을 죽이지 않는 왕'으로, 이번 <천문>의 세종은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는 왕'으로 생각하며 연기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살리고 싶었지만 곁에는 둘 수 없었던 사람.
이 틀로 보면 욕설 장면도 다시 보입니다. 결국 자신이 가진 권력으로도 지킬 수 없을 것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의 마지막 저항처럼 느껴졌습니다. 8년의 시간을 지난 세종은 조금 더 외롭고 애틋한 사람이 되어 있었습니다.
최민식의 장영실도 그 감정을 단단히 받아냅니다. 왕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하는 신하지만, 하늘을 이야기할 때만큼은 세종과 같은 곳을 바라봅니다. 두 배우가 마주 앉아 별과 조선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장면에서는 잔잔한 대사만으로도 팽팽한 힘이 느껴졌습니다.
한석규가 세종의 외로움을 크게 터뜨리는 방식으로 보여준다면, 최민식은 장영실의 마음을 눈빛과 머뭇거림 안에 눌러 담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이 애틋하게 보이는 건, 왕과 신하라는 선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선 너머의 마음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록이 멈춘 자리
실제 《세종실록》에는 1442년 장영실이 감독해 만든 안여가 부서져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장영실은 역사 기록에서 자취를 감춥니다. 그가 왜 사라졌는지, 세종과 마지막에 어떤 말을 주고받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화 속 두 사람의 우정과 안여 사건을 둘러싼 진실은 이 빈자리를 채운 영화적 상상입니다.
저는 오히려 그래서 이 영화가 흥미로웠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지 두 사람의 관계를 상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를 보고 나면 별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둘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있던 왕.
가장 외로워 보였던 그의 얼굴이 특히 더 생각납니다.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작품 정보
- 개봉: 2019년 12월 26일
- 장르: 드라마, 사극
- 감독: 허진호
- 각본: 정범식, 이지민
- 출연: 최민식, 한석규, 신구, 김홍파, 허준호, 김태우
- 러닝타임: 132분
-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천문: 하늘에 묻는다>는 조선의 하늘과 시간을 만들고자 했던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에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작품입니다. 허진호 감독은 세종이 뛰어난 신하들을 쉽게 버리지 않았는데 장영실은 안여 사건 이후 왜 역사에서 사라졌는지에 대한 궁금증에서 출발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실제 《세종실록》에는 1442년 장영실이 감독해 만든 안여가 부서져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고, 이후 형벌을 감형받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글
넷플릭스 영화 <전,란> 리뷰|싱겁다고 생각했던 결말이 며칠을 따라온 이유
역사의 거대한 사건보다
그 안에서 갈라지고 뒤엉킨 사람들의 관계를
더 깊이 바라보는 작품입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 천문: 하늘에 묻는다> 포토, 넷플릭스 코리아
※ 참고 자료
- 조선왕조실록 세종 24년 장영실 안여 사건 기록
-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장영실 임용 관련 기록
- 영화 <천문: 하늘에 묻는다> 한석규 개봉 인터뷰
- 연합뉴스 허진호 감독 인터뷰 / 노컷뉴스 「〈천문〉이 132분짜리 영화가 된 이유」
'한국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리뷰|바꿀 수 있어도, 바꿀 수 있을까 (0) | 2026.07.26 |
|---|---|
| 영화 <어쩌면 해피엔딩> 리뷰|영화 한 편을 보는 동안 질문이 세 번 바뀌었다 (0) | 2026.07.25 |
| 영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리뷰|하루만 온다 해도 만날 겁니다 (0) | 2026.07.22 |
| 영화 <버닝> 리뷰|나는 분명히 거기 있었는데 (0) | 2026.07.21 |
| 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리뷰|개봉한 줄도 몰랐던 영화가 이렇게 예쁠 일인가 (0) | 2026.07.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