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너무 추워서 발을 동동거리면서 걷고 있던 중에 동네 골목에서 폐지를 주우시던 할머니 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항상 거기 계시던 분이라 늘 그냥 지나쳤는데, 그날따라 손이 너무 시려보여서 걸음을 멈췄습니다.
제 주머니에 있던 손난로를 쥐어드리고 돌아서는데 갑자기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거기 계신다는 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분이 춥다는 건 그날 처음 느꼈구나 싶어서요. 계절이 몇 번 바뀌도록 거기 계신 분이었는데.
<사람과 고기>를 보고 난 뒤 그 골목이 떠올랐습니다. 영화 때문에 떠오른 건지, 원래 잊지 못했던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풍경이 된 사람들
영화는 가난하고 외롭게 살아가는 노인 셋의 이야기입니다. 폐지를 줍는 형준과 우식, 길거리에서 채소를 파는 화진. 폐지 문제로 다투던 형준과 우식을 화진이 타박하면서 세 사람의 인연이 시작되고, 이들은 함께 고기를 먹으러 다니게 됩니다. ‘공짜’로요.
줄거리만 들으면 노인 범죄 코미디처럼 들리는데, 실제로 앉아서 보면 웃기다가 멈칫하는 순간이 자꾸 옵니다. 킬로그램당 60원인 폐지를 하루 종일 모아야 천 원 남짓. 그 숫자가 화면에 짧게 지나가는데, 숫자 자체보다 그만큼을 벌기 위해 리어카를 미는 하루가 어떤 하루인지 생각하게 됐습니다. 그 하루가 쌓여서 이 사람들 삶이 된다는 것도요.
세 사람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방식이 딱 우리가 거리에서 이분들을 보는 방식과 같습니다. 그냥 거기 있습니다. 늘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 할머니가 추위를 타는 사람이라는 걸 오랫동안 못느꼈던 것처럼, 화면 밖의 우리도 이 사람들이 배가 고프다는 걸, 외롭다는 걸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영화는 그 당연함을 아주 조용히 흔들어 놓습니다. 큰 소리 하나 없이요.
우식이라는 사람
세 인물 중 가장 오래 생각나는 건 우식입니다. 처음에는 그냥 투덜대는 영감님처럼 보입니다. 형준이 형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형님은 개뿔"이라고 받아치고, 고기를 사준다고 꼬드겨 놓고 무전취식을 시킨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이 판을 벌렸으면서 가장 뻔뻔하게 잘 먹는 인물이에요. 초반에는 솔직히 좀 얄밉습니다.
그런데 영화 중반쯤, 우식이 간암 말기라는 사실이 나옵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화면을 잠깐 멈추고 싶었습니다.
그 정보를 알고 나자 앞 장면들이 전부 다시 보였습니다. 고기에 집착하던 이유, 걸음이 조금 느렸던 것, 농담처럼 내뱉던 말들. 처음부터 보이지 않던 것들이 뒤늦게 보이는 느낌이었습니다. 우식을 화면에서 처음부터 풍경으로 봐왔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우식이 나중에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인생에서 형준, 화진과 고기를 먹으러 다니던 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요. 범죄였던 그 시간이 생의 가장 빛나는 기억이었다는 말을 들으면서, 저는 슬프다는 생각보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 행복이 불법이 돼야만 했다는 것 자체가요. 영화는 그걸 두고 크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우식의 얼굴을 보여줄 뿐이에요. 그 얼굴이 오래 남습니다.
혼자 먹기엔 서러운 음식
영화 소개 문구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 있어야 먹을 수 있고, 혼자 먹기엔 서러운 음식, 고기."
처음엔 그냥 홍보 카피라고 생각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이 문장이 가장 정확한 요약이었습니다. 세 사람이 진짜로 원한 건 고기만이 아니었습니다. 같이 먹는 것, 기다려 주는 사람, 오늘 뭘 먹을지 같이 고민하는 시간이었던 거겠지요. 고깃집 불판 앞에서 세 사람이 웃는 장면이 범죄 장면인데도 이상하게 흐뭇하게 보이는 건 그래서입니다.
화진에게는 가끔 들르는 손자가 있습니다. 반가운 얼굴로 나타나지만 대화가 항상 용돈 얘기로 끝납니다. 화진은 그걸 알면서도 손자가 오면 좋아합니다. 그 장면이 참 묘하게 씁쓸하면서도 기다리는 사람한테는 자신을 찾아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형준도 마찬가지입니다. 20년 넘게 연락이 끊긴 아들들 명의의 집에 얹혀 살면서, 폐지를 팔아 하루를 버팁니다. 세 사람 각자의 사정을 알고 나면, 이들이 왜 굳이 같이 다녔는지가 더 선명해집니다. 그 불판 앞이 이들한테 유일하게 손님 대접을 받는 자리였을 겁니다.
재판 장면도 기억에 남습니다. 판사가 상습사기 혐의를 냉담하게 읽어 내려가는 동안, 세 사람은 그냥 앉아 있습니다. 틀린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가 이상하게 불편합니다. 법이 옳다는 건 알겠는데, 이 사람들이 왜 이렇게까지 됐는지를 법정은 묻지 않으니까요.
골목으로 돌아가서
손난로를 드리고 돌아서던 날 저는 그분께 이름을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걸었습니다. 날씨가 풀리고, 여름이 오고, 다시 겨울이 왔을 때도 그분은 골목에 계셨습니다. 저는 계속 지나쳤습니다.
<사람과 고기>를 보고 나서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그분한테 먼저 말을 걸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가끔, 지나칠 때 잠깐 봅니다. 오늘 거기 계신지. 오늘은 손이 어떤지.
영화가 바꾼 건 딱 그 정도였습니다.
영화 <사람과 고기>에 대하여
- 개봉: 2025. 10. 07.
- 장르: 드라마
- 감독: 양종현
- 각본: 임나무
- 출연: 박근형(형준), 장용(우식), 예수정(화진)
- 러닝타임: 107분
-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초청: 제30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 부문
영화 〈사람과 고기〉는 폐지 수거와 길거리 채소 장사로 생계를 이어가는 세 노인이 고기를 먹기 위해 무전취식을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노인 빈곤과 고독, 죽음이라는 무거운 문제를 다루지만 인물들을 일방적인 연민의 대상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투닥거리고 욕심내고 함께 도망치는 세 사람의 모습을 블랙코미디와 우정의 이야기로 풀어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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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에서 출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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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보는 작품입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사람과 고기>, <앙: 단팥 인생 이야기>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사람과 고기> 공식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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