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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영화 <백수아파트> 리뷰|소리는 들리는데 얼굴을 모른다는 것

by 그린팝콘 2026. 7. 7.
📖 목차

영화 백수아파트 포스터
▲ 영화 <백수아파트> 포스터

 

예전에 반지하 자취방에 살 때 밤마다 쿵쿵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려고 누우면 어김없이 시작됐습니다. 처음엔 위층이겠거니 했는데, 소리 방향이 묘하게 달라서 확신이 서질 않았습니다. 벽을 타고 오는 건지, 옆에서 오는 건지. 반지하라는 구조 탓인지 소리가 사방에서 오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그러다 보면 소리에 집중하게 됩니다. 발소리인지 물건을 떨어뜨린 건지, 리듬이 일정한지 불규칙한지. 잠을 자야 하는데 소리를 분석하고 있는 겁니다.

 

그때 저를 괴롭힌 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었습니다. 소리의 주인을 모른다는 사실이 저를 더 갉아먹었습니다. 얼굴을 알면 화라도 낼 수 있는데, 얼굴 없는 소리한테는 감정을 어디로 보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복도에 나가봤다가 아무것도 확인 못 하고 그냥 들어온 날도 있었습니다.

 

결국 저는 시간이 해결해 주기를 기다렸고, 어느 날 소리가 멎었는지 이사를 간 건지도 모르고 이사를 나왔습니다.

 

영화 〈백수 아파트〉를 보면서 그 반지하 시절 밤이 자꾸 겹쳤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백수아파트>는 어떤 영화일까

2025년 2월 26일 개봉한 <백수아파트>는 이루다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경수진, 고규필, 이지훈, 김주령, 최유정 등이 출연한 98분의 미스터리 코미디 영화입니다. 12세 이상 관람가이며, 마동석이 제작에 참여했습니다. 시나리오는 2020년 영화진흥위원회 한국영화 시나리오 공모전에서 장려상에 선정됐습니다.

 

오지랖 넓은 백수 거울은 동생과 다툰 뒤 백세아파트에 잠시 머물게 됩니다. 그런데 입주 첫날부터 매일 새벽 4시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굉음이 들립니다. 주민들은 이미 6개월째 소리에 시달리고 있었고, 거울은 경석·지원·샛별과 함께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소음의 근원을 찾기 시작합니다.

 

처음에는 층간소음의 범인을 찾는 가벼운 추적극처럼 시작하지만, 이야기는 점차 재건축과 철거를 둘러싼 이해관계까지 넓어집니다.

아파트라는 이상한 구조

아파트는 본래 좀 이상한 공간입니다. 위아래 옆으로 수십 명이 붙어 살면서도 서로 얼굴을 모릅니다. 엘리베이터에서 한두 번 마주쳐도 이름을 모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목소리를 갖고 있는지, 몇 살인지, 혼자 사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발소리는 압니다.

 

새벽 두 시에 무언가를 끌어당기는 소리도 압니다.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가끔 터지는 웃음소리, 문 닫히는 강도까지 어느새 외우게 됩니다. 얼굴은 모르고 생활소음을 먼저 외우는 이웃 관계. 저는 이게 참 묘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 시절 이웃에게 이름을 붙이기도 했습니다. '쿵쿵 아저씨'라고요.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는 전혀 몰랐습니다. 그냥 소리를 기반으로 상상한 사람이었습니다.

 

쿵쿵거리는 걸음걸이로 봐서 아마 남자일 거다, 밤늦게까지 소리가 나니 야행성일 거다, 어떤 날 소리가 유독 무거우면 술을 마셨나 보다. 이런 식으로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인데 머릿속에는 꽤 구체적인 인간 하나가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백수아파트>의 거울도 비슷한 일을 합니다. 새벽 4시의 소리를 들으며 데시벨을 측정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누가 소리를 내는지 좁혀갑니다.

 

그런데 이 영화의 이루다 감독에게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는 게 재미있습니다. 오피스텔에 살던 시절 계속되는 쿵쿵 소리를 견디다 못해 직접 모든 호수를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소리의 정체는 건물 외벽에서 찢어진 현수막 프레임이 부딪히는 소리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알고 나니 제가 만들었던 '쿵쿵 아저씨'가 조금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아저씨 자체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까요.

소리와 상상 사이

층간소음이 힘든 이유 중 하나는 소리만 있고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얼굴 없는 소리일 때는 무엇이든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일부러 그러는 사람일 수도 있고,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일 수도 있고, 문을 두드렸다가는 큰일 날 만큼 무서운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저도 좋은 사람보다 나쁜 사람을 먼저 상상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찾아다니는 거울이 무모해 보이면서도 부러웠습니다. 거울은 문들 두드려 사람을 만나고, 묻고, 틀렸다는 걸 알면 다른 집으로 갑니다.  

 

그런데 <백수아파트>에서는 소음의 정체를 알아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민폐 이웃 한 명'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소리 뒤에는 사람의 사정이 있고, 또 그 뒤에는 백세아파트의 재건축과 철거를 둘러싼 더 큰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소리에 얼굴을 붙이는 일은 범인을 찾아내는 끝이 아니라, 보이지 않았던 속사정을 보기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보였습니다. 그 사람이 옳은것도 아니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이해해야 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얼굴 없는 소리였을 때 제가 만들어낸 사람과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차이가 저는 이 영화에서 가장 재미있었습니다. 

반지하 시절의 내가 틀렸던 것

저는 그때 소리의 주인을 찾으러 가지 않았습니다. 진짜로 무서웠기 때문입니다.

 

얼굴 없는 소리를 참는 건 그래도 할 수 있는데, 막상 문을 두드렸다가 어떤 사람이 나올지 모른다는 게 더 두려웠습니다. 좋은 사람이 나올 수도 있는데, 저는 왜인지 나쁜 사람을 먼저 상상했습니다.

 

그 공포의 정체가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됩니다. 익명의 불쾌함은 참을 수 있습니다. 그냥 소음이니까요. 그런데 그게 구체적인 갈등이 되는 순간, 즉 얼굴과 얼굴이 맞닥뜨리는 순간이 두렵습니다.

 

아파트라는 공간은 그 심리를 교묘하게 허용합니다. 서로 모르는 상태를 유지하면 큰 싸움은 없습니다. 작은 해결도 없습니다. 각자 참거나 떠납니다. 저처럼요.

 

생각해 보면 층간소음을 참는 동안 저는 계속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나쁜 사람을 상상하고, 그 상상 위에 분노를 쌓고. 실제로는 아무 일도 안 하면서 머릿속에서 혼자 싸우고 있었던 겁니다.

 

안거울은 그 싸움을 밖으로 꺼냈습니다. 저와의 유일한 차이는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맞닥드리는 그 시점이 오기 전에 그냥 이사를 해버렸습니다. 그래서 쿵쿵 아저씨의 얼굴은 영영 알지 못했습니다.

같은 소리를 들은 사람들

극장을 나오면서 지금 사는 집 윗집 사람 얼굴을 생각했습니다.

 

모릅니다.

 

몇 년째 같은 건물에 살고 있는데 모릅니다. 가끔 발소리는 들리고, 아침마다 물 내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올라오는지 발소리가 달라지는 날도 있고, 청소기 돌리는 소리가 들리기도 합니다. 다 들리는데 얼굴은 모릅니다.

 

저는 이분을 마음속으로 '슬리퍼 씨'라고 부릅니다. 슬리퍼를 끌며 다니는 소리가 유독 선명하게 들리거든요.

 

다만 이제는 슬리퍼 씨의 소리가 거슬리는 날에도, 제가 소리만으로 만들어낸 얼굴과 실제 사람은 다를 수 있다는 생각할 것 같습니다.

〈백수 아파트〉는 그 이상한 동거에 대한 영화입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극장 안에는 웃음소리가 여러 번 터졌습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저는 괜히 같이 나오는 사람들 얼굴을 한 번씩 봤습니다.

 

낯선 사람들인데 조금 전까지 같은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라는 게 묘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람들의 발소리는 모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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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백수아파트>, <사람과 고기>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백수아파트> 공식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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