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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이 영화 이야기를 하다가 잊혀지지 않는 말을 들었습니다. 규남이 군생활 10년을 채우고도 제대 후를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는 대목에서, 말년에 복무 기간이 10년으로 연장된다는 상상만 해도 숨이 콱 막히는 것 같다고요. 그러고는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게 얼마나 천만다행이냐며 진짜로 가슴을 여러 번 쭉- 쓸어내렸습니다.
저는 그 과장된 손동작이 뭔가 웃겼습니다. 군대 얘기만 나오면 십 년 전 제대한 사람들도 어제 일처럼 진저리를 치는 게 우리나라 남자들이니까요. 그런데 집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니 웃음기가 조금 가셔졌습니다. 화면 속에서 그건 상상이 아니라 누군가의 그냥 인생이었으니까요.
2024년 여름에 개봉한 <탈주>는 이종필 감독이 연출하고 이제훈과 구교환이 나온 추격극입니다. 휴전선 근처 북한군 부대의 말년 중사 규남이 남쪽으로 넘어가려 하고, 보위부 소좌 리현상이 그를 쫓습니다. 줄거리는 이게 전부라고 해도 될 만큼 단순하지만 영화는 그걸 첨부터 끝까지 붙잡고 속도를 계속 올립니다. 상영시간이 94분인데 제 체감은 그 절반쯤이었습니다. 숨고를 틈을 잘 안 주는 영화입니다.

영화 탈주 줄거리|앞날이 창창하다는 말의 무게
규남은 겉으로 보면 모범 병사입니다. 현상은 규남을 탈주병을 잡은 영웅으로 만들어주고, 사단장 직속 보좌 자리까지 마련해 줍니다. 북에서 그 정도면 앞길이 창창하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문제는 그 앞길을 규남 본인이 고른 적이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매일 밤 몰래 군사분계선 근처의 지뢰 위치를 외우고 손으로 지도를 그립니다. 밤잠을 줄여가며 몇 년을 준비한 계획인데, 부대의 하급 병사 동혁이 곧 큰비가 온다는 예보를 내놓으면서 시간표가 통째로 흔들립니다. 비가 오면 발자국이 남고 강이 불어나니, 규남에게 남은 시간은 며칠뿐입니다. 이 설정때문에 초반부터 마음이 급해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영화보면서 등을 제대로 붙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규남이 하늘을 올려다볼 때마다 저도 같이 초조해졌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제일 인상적인 건 규남이 남쪽에 가서 성공하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실패라도 좋으니 내가 정한 길을 가보겠다고 합니다. “내 앞길, 내가 정했습니다. 마음껏 실패하러 가는 겁니다.” 라는 대사. 실패하러 간다니… 실패할 자유. 이런 단어 조합을 저는 이 영화에서 처음 봤습니다.
친구가 숨이 막힌다고 한 지점도 정확히 여기였을 겁니다. 10년을 버텼는데 그 끝에 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 또다시 남이 정해준 자리라는 것. 저라도 그 자리에서는 도망치는 쪽에 인생을 걸었을 겁니다.
웃는 얼굴로 목을 조르는 남자
리현상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구교환은 이 인물을 소리 지르는 악역으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파티장에서 피아노를 치고, 부드럽게 웃고, 예의 바른 말투로 사람을 조여옵니다.
제 눈에 리현상은 자기 인생을 변호하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규남을 잡는 일은 그다음입니다. 그는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인 대가로 지금의 지위를 얻은 인물입니다. 그런 사람 앞에서 규남이 선을 넘어 버리면, 여태 견뎌온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초라해집니다. 중간에 규남이 검문에 걸리는 장면이 있는데, 심장이 쫄깃해지면서 손에 땀이 났습니다. 거짓말이 들통나기 직전의 침묵이 총격전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그 추격이 집요하고, 어딘가 서글픕니다. 악역을 보면서 안쓰럽다는 감정이 들다니. 더이상 말이 필요없죠.
두 배우의 만남에는 뒷이야기도 있습니다. 이제훈이 청룡영화상 시상식 단상에서 같이 연기하고 싶은 배우로 구교환을 콕- 집어 말했고, 그 공개 러브콜이 이 작품에서 이뤄졌다고 합니다. 서로 원해서 만난 배우들이라 그런지 두 사람이 마주 보는 장면마다 별 다른 행동을 하지 않아도 팽팽한 긴장감이 있습니다. 58kg까지 체중을 줄이고 이제훈의 질주도 대단하지만, 저는 오히려 쫓아가는 구교환에게 더 눈이 가더라구요. 현상은 규남의 탈주를 막으려는 동시에, 자기가 선택하지 못했던 삶까지 지키려 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만갑을 보던 밤들
저는 예전에 '이제 만나러 갑니다'를 즐겨 봤습니다. 채널을 돌리다 탈북 이야기가 나오면 손이 멈췄습니다. 얼어붙은 강을 건넌 이야기, 브로커에게 속아 몇 년을 돌아 돌아 온 이야기, 가족을 두고 혼자 넘어와 명절마다 북쪽을 향해 절을 한다는 이야기. 실화일까 의심까지 되는 이야기. 출연자들은 그걸 웃으면서 말하는데 듣는 저는 자주 목이 메었습니다. 웃으면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마나 오래 울었을지 짐작도 안되서요. 그때는 이 프로그램이 어떻게 이렇게 오래 방송되나 했는데, 사연이 마르지 않아서였겠지요. 선을 넘어온 사람의 수만큼 이야기가 있었을 테니까요.
그 프로그램을 보고 난 밤이면 제 방바닥이 갑자기 든든하게 느껴졌습니다. 내일 출근하기 싫다는 투정이 얼마나 배부른 소리인지도요. 그러니까 저에게 <탈주>는 허구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규남처럼 목숨을 걸고 그 선을 넘어온 사람들이 실제로 있고, 저는 그 사람들의 얼굴을 텔레비전으로나마 봤으니까요. 실제로 이제훈 배우가 북한말 고증을 위해 군인 출신 탈북민에게 직접 코칭을 받았다고 하니, 영화와 그 밤들이 계속 겹쳐 보였습니다.
후반부에 영화가 규남을 그냥 계속 달리게만 하는데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건 그래서였습니다. 저 달리기가 누군가에게는 실화라는 걸 아니까요.
시시한 선택들의 값
영화를 본지 좀 지났는데도 퇴근길에 가끔 규남 생각이 납니다. 지하철을 탈지 버스를 탈지 고르는 순간이나, 야식 메뉴를 정하다가 귀찮아서 아무거나 고르는 순간 같은 때에요. 아무것도 아닌 이 선택들이 누군가는 지뢰밭을 건너서라도 가지고 싶어 했던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늘 저녁 메뉴 고민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뉴스에서 북한 소식이 나와도, 저 안 어딘가에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고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겠다는 생각에 영화 속 규남이 생각 납니다.
제 친구는 아마 이 영화를 잊고 살 겁니다. 시간이 좀 지나면 저도 그러겠죠. 그래도 숨이 콱 막힌다며 가슴까지 쓸어내리던 그 호들갑이, 어쩌면 이 영화에 대한 가장 정직한 리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이미지 출처 :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 참고 자료 - 영화 <탈주> - 관련 배우 인터뷰 및 제작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