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영화를 보다가 멈칫하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주인공 조가 어머니의 빈 주방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이었는데,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어요. 저도 몇 해 전 할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한동안 명절 음식 냄새가 무서웠거든요. 이상하게도 냄새와 맛에서 느껴지는 슬픔은 뭔가 더 아린 것 같습니다. 따뜻함이 필요할 때, 잔잔하게 어깨를 감싸주는 듯한 논나를 보면 너무 좋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기대가 없었습니다. 제목도 뭔지 모르겠고, 포스터도 특별히 끌리는 구석이 없었어요. 그냥 허한 주말 저녁에 무심코 틀었다가 두시간이 그대로 지나가버렸습니다. 뒤통수를 세게 맞는 영화가 아닙니다. 대신 어깨를 살며시 감싸주는 영화예요. 요즘 그런 게 더 필요할 때가 많더라고요.

논나 — '할머니'를 번역하지 않은 이유
영화를 보기 전에 제목부터 짚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논나'가 뭔지 모르고 시작하면 초반에 좀 헷갈리거든요. 저도 처음엔 사람 이름인 줄 알았습니다. 주인공이 어린 시절 엄마와 논나가 해준 음식 이야기를 꺼내는데, '논나가 대체 누구지?' 싶었죠. 코코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특정 가족 구성원 이름처럼 쓰이는 건가 싶기도 했고요. 알고 보니 이탈리아어로 할머니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막에서 굳이 '할머니'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발음 그대로 '논나'로 표기한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데, '논나'라는 단어 안에는 단순한 할머니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가족의 온기, 손때 묻은 레시피, 이민자 세대의 자부심, 세월이 켜켜이 쌓인 삶 같은 것들이요. '할머니들'이라고 번역했다면 그 뉘앙스가 절반은 날아갔을 겁니다. 처음엔 알쏭달쏭했지만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왜 번역하지 않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집니다. 어떤 단어는 번역이 되는 순간 오히려 가벼워지는 법이니까요. 이건 단지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 문화와 감정의 결을 살리려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조 — 대책 없이 따뜻한 남자의 도전
이 영화의 진짜 매력은 주인공 '조'라는 캐릭터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입니다. 요식업 경험도 없고, 넉넉한 자본도 없는데 어느 날 대뜸 식당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이유는 단 하나, 돌아가신 어머니를 기리고 싶어서. 현실적으로 보면 그냥 무모한 겁니다. 요즘 자영업이 얼마나 힘든지는 해본 사람이 아니어도 대충 알잖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응원하게 됩니다. 처음엔 '저러다 망하겠구나' 싶다가도, 조가 논나들 한 명 한 명을 찾아다니는 장면을 보면서 어느새 저도 같이 가슴이 두근 두근거리고 있었어요. 빈스 본이 이 캐릭터를 정말 잘 소화했습니다. 원래 코미디 이미지가 강한 배우인데, 여기서는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새로운 시작에 대한 두려움을 과장 없이 묵직하게 표현합니다. 엔딩 크레딧에 실제 인물 조가 등장하는데, 진짜 영화 속 묘사 그대로의 사람이더라고요. 그 순간 확실히 느꼈습니다. 현실이 때로는 어떤 각본보다 더 극적이라는 것을 말이지요. 저도 한때 아무 준비 없이 뭔가를 덜컥 시작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조의 무모함이 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순수한 추진력이 부러웠어요.
할머니들 — 세월이 빚어낸 손맛의 깊이
영화의 심장은 결국 논나들입니다. 수잔 서랜든, 로레인 브라코, 탈리아 샤이어, 브렌다 배카로.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인데, 스크린 안에서는 그냥 동네 어딘가에 살고 있을 법한 할머니들로 보였습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 논나들은 전문 셰프가 아닙니다. 요리학교를 나온 것도,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일한 것도 아닙니다. 그냥 평생 가족을 위해 요리해온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 손맛이 음식 평론가의 극찬을 받습니다. 라따뚜이에서 프랑스 가정식이 평론가를 무장 해제시키는 장면처럼, 이 영화에서도 화려함이 아닌 진심이 세상을 움직이는 순간이 나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흑백요리사'의 급식대가 같은 분들이랄까요. 기술보다 세월이 만들어낸 맛. 각각의 논나들은 레시피를 둘러싸고 티격태격하기도 하고, 자기 방식을 고집하기도 합니다. 특히 시칠리아 출신 로베르타와 볼로냐 출신 안토넬라가 서로 자기 지역 요리가 진짜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은 웃음이 나오면서도 정겹습니다. 저도 명절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간장 양을 놓고 입씨름하시던 게 생각났거든요. 파스타 반죽을 밀대로 밀어내는 장면에서 이유도 모르게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우는 장면도 아닌데 그게 더 슬프고 아름다웠어요. 수녀 출신 캐릭터 테레사는 특유의 깐깐함과 다정함이 공존해서 유독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논나는 보고 나면 이상하게 배가 고파지는 영화입니다. 스크린 속 음식이 화려해서가 아닙니다. 엄마가 끓여주시던 된장찌개, 명절마다 할머니가 부쳐주시던 전 같은 것들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에요. 영화 한 편 봤을 뿐인데 누군가랑 식탁에 마주 앉고 싶어집니다. 조용한 저녁, 마음이 조금 비어 있는 날에 이 영화 ‘한 그릇’ 추천합니다. 맛은 담백하고, 여운은 오래 남습니다. 넷플릭스에서 지금 바로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