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한동안 명절 음식 냄새가 무서웠습니다. 정확히는 무섭다기보다는 피하고 싶었습니다. 전 부치는 냄새, 송편 찌는 냄새, 떡국 끓이는 냄새… 외할머니댁 부엌 냄새가 나면 저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냄새 안에 외할머니가 없다는 게 너무 이상했거든요. 냄새는 그대로인데 그 냄새의 주인이 없는 상태. 뭐라고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습니다.
영화 <논나>를 보다가 그 때의 느낌이 다시 올라왔습니다. 주인공 조가 어머니의 빈 주방을 멍하니 바라보는 장면에서였습니다.
아무 대사도 없는 장면인데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자격보다 기억을 먼저 본 식당
조는 요식업 경험이 없습니다. 요리학교도 안 나왔고, 식당을 운영해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를 떠나보내고 나서 대뜸 이탈리아 식당을 차리겠다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버립니다.
이유는 하나입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만들어온 음식을 세상에 남겨두고 싶어서.
현실적으로 보면 너무 무모한 겁니다. 그런데 저는 그 무모함이 밉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영화 내내 저는 조를 응원했습니다.
우리는 자격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뭔가를 시작하려면 자격증이 있어야 하고, 경험이 있어야 하고, 포트폴리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조가 하려는 일은 자격으로 버티는 게 아닙니다. 사라지는 것들을 붙들어두는 일이니까요. 조에게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음식이 자신과 함께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했지 자격 증명이란 건 필요도 없었을 겁니다.
실제 조 스카라벨라의 논나 면접 방식을 알고 나니 이 생각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그는 논나를 면접할 때 요리를 시켜보지 않았습니다. 대신 어떤 음식을 먹고 자랐는지, 어머니가 무엇을 만들어줬는지를 물었습니다. 몇 분 이야기해보면 요리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저는 참 좋았습니다.
조가 찾던 것은 음식을 잘 만드는 사람만이 아니었던 겁니다. 어떤 식탁에서 자랐고 무엇을 기억하면서 요리하는 사람인지를 보고 있었습니다.
조가 논나들 한 명 한 명을 찾아다니는 장면을 보면서 어느새 저도 같이 두근거리고 있었습니다.
※ 참고 자료: New Hampshire Public Radio, 「Italian ‘Nonnas’ Bring Taste of Home to Staten Island」
셰프보다 논나여야 했던 이유
영화의 심장은 결국 논나들입니다. 수잔 서랜든, 로레인 브라코, 탈리아 샤이어, 브렌다 바카로.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배우들인데, 영화 안에서는 어딘가에 실제로 살고 있을 법한 할머니들로 보였습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평생 가족을 위해 요리해온 논나들. 미슐랭 레스토랑이나 요리책 없이도 그 손맛이 음식 평론가의 극찬을 받습니다.
파스타 반죽을 와인병으로 밀어내는 논나의 손을 보는데 저는 외할머니의 손이 보였습니다. 영화가 그 손을 특별히 오래 비춘 것은 아니었지만, 저한텐 잘 보였습니다. 명절이면 밀가루를 묻히고 전을 뒤집던 주름진 손처럼요. 그래서 그런지 저는 파스타 반죽 장면에서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시칠리아 출신 로베르타와 볼로냐 출신 안토넬라가 서로 자기 지역 요리가 진짜 이탈리아 음식이라고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웃으면서 봤는데 명절마다 엄마와 외할머니가 간장 양으로 입씨름하시던 게 생각나서 피식- 했습니다. 그 입씨름도 결국 자기 방식에 대한 확신이었을 겁니다. 오래 해온 음식일수록 쉽게 양보할 수 없는 마음이 있잖아요.
그리고 한국 제목에서도 ‘할머니’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남겨둔 ‘논나’라는 단어. 처음에는 조금 낯설었는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왜 제목이 〈할머니들〉이 아니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가족의 온기, 손때 묻은 레시피, 이민자 세대의 자부심 같은 것들이 그 단어 안에 켜켜이 쌓여 있습니다. 그런 단어는 번역이 되는 순간 오히려 가벼워집니다.
기억을 보존하는 방식
이 영화를 보면서 갑자기 든 생각이 있는데요. 사람이 떠나고 나면, 그 사람의 어떤 부분이 남는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몇 년이 지나자 목소리가 살짝 흐릿해졌습니다. 그런데 음식에 붙어 있는 기억은 달랐습니다. 명절에 부천 큰이모가 부친 전을 먹다가 불쑥 외할머니가 떠오를 때가 있었습니다.
맛이 똑같아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음식을 먹을 때의 감각, 밥상 앞에서 느꼈던 안도감 같은 게 어딘가에 살아 있었습니다. 배부르다는 것과는 다른 어떤 충만함 같은거요.
조가 식당을 열기로 한 이유도 그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방식으로 기억하는 것보다, 그 맛을 세상에 살아있게 하는 것. 식당 운영 경험도 없이 시작했지만, 그가 지키려 한 것은 자격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엔딩 크레딧에는 실제 인물 조가 나옵니다. 영화 속 묘사 그대로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걸 보면서 현실이 때로는 어떤 각본보다 더 극적이라는 생각을 잠깐 했습니다.
영화를 본 뒤에 저는 부천 큰이모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그냥 명절 때 전 부치는 법 배워도 되냐고 물어보고 싶어서요.
큰이모는 잠깐 조용히 있다가 말했습니다.
“그럼 와”
<논나>는 어떤 영화일까?
2025년 5월 9일 공개된 <논나>는 실제 스태튼아일랜드 식당 ‘에노테카 마리아’의 창업자 조 스카라벨라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넷플릭스 영화입니다. 스티븐 차보스키 감독이 연출하고 리즈 매키가 각본을 썼으며, 빈스 본과 수전 서랜던, 로레인 브라코, 탈리아 샤이어, 브렌다 바카로 등이 출연합니다. 러닝타임은 114분입니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조는 가족과 함께 먹었던 음식의 기억을 붙잡기 위해 이탈리아 식당을 열기로 합니다. 그런데 그가 주방으로 불러들인 사람들은 전문 셰프가 아니라 각자의 지역 음식과 가족의 조리법을 간직한 할머니들, ‘논나’입니다.
영화의 모델이 된 실제 에노테카 마리아도 2007년 문을 열었습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 각 지역의 논나들이 요리했고, 이후에는 세계 여러 나라의 할머니들까지 주방에 서게 됐습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글
영화 <계춘할망> 리뷰|가짜 손녀에게 왜 화가 나지 않았을까
할머니와 젊은 세대가
서로에게 돌아갈 집이 되어주는
따뜻한 작품입니다
※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네이버 영화 <계춘할망>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논나> 공식 작품 정보
'OTT · 드라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넷플릭스 영화 <아쿠아리움이 문을 닫으면> 리뷰|문어의 눈으로 사람을 본 밤 (0) | 2026.07.02 |
|---|---|
| 넷플릭스 영화 <토스카나> 리뷰|마늘 냄새가 먼저 설득한 것들 (0) | 2026.06.27 |
| 넷플릭스 영화 <전,란> 리뷰|싱겁다고 생각했던 결말이 며칠을 따라온 이유 (0) | 2026.06.16 |
| 넷플릭스 <참교육> 리뷰|교사 친구의 한숨이 자꾸 겹쳐 들렸던 드라마 (0) | 2026.06.16 |
| 넷플릭스 <은중과 상연> 리뷰|82년생이 어린시절 사진을 찾고 싶어진 드라마 (0) | 2026.06.15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