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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말을 보고 나서 솔직히 '좀 싱겁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7년의 오해가 대화 몇 마디로 풀리는 게 너무 쉽지 않나 싶었거든요. 그런데 종려가 죽는 순간까지 붉은 끈을 풀지 않았다는 장면이 계속 떠올라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그제야 제가 이 영화를 얕게 봤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말로 해소되는 오해보다, 끝내 풀지 않은 끈 하나가 훨씬 더 많은 걸 말하고 있었으니까요.

낮밤대비 - 신분제의 명암을 가르는 시간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낮과 밤의 대비였습니다. 단순히 시간대 차이가 아니라, 신분 질서의 명암을 시각적으로 가르는 연출 장치로 쓰였습니다. 선조가 대동사상을 주창한 정여립 무리를 처단하고 목을 내거는 장면은 대낮에 이루어집니다. 신분 질서를 공고히 하는 행위가 가장 밝은 시간대에 버젓이 벌어지는 거죠.
반면 밤의 장면들은 전혀 달랐습니다. 종려와 천영이 함께 무술을 연습하는 것도, 노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것도, 피난 중인 선조에게 평민들이 달려드는 것도 모두 해가 진 뒤였습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자령 장군 진영에서 밤에 닭다리를 뜯으며 격식을 허무는 장면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습니다. "낮의 질서는 영원할 것 같지만, 반드시 밤은 온다"는 메시지가 말 한마디 없이 화면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연출이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에요.
연기력 - 온몸으로 소화한 흑화와 해소
박정민 배우의 연기에 대해서는 '좋다'는 말로는 부족합니다. 사극에서 감정의 폭이 넓은 캐릭터를 소화하는 건 굉장히 까다로운 일입니다. 종려라는 인물은 특히 그랬습니다. 처음엔 노비에게도 '난 친구라고 생각한다'라고 따뜻하게 말하던 사람이, 전쟁을 거치며 완전히 다른 인간이 됩니다.
아버지가 천영을 죽이려 드는 상황에서 친구를 살리고 싶으면서도 아버지를 거스를 수 없는 그 난감함을 표현하는 장면, 그리고 식솔이 다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으로 칼을 제대로 휘두르는 장면. 그 표정들이 지금도 제 눈에 선합니다. 흑화와 갈등, 그리고 마지막 해소까지 긴 감정의 궤적을 '연기를 한다'는 느낌 없이 소화해 내는 것이 보는 내내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강동원이 연기하는 천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신념을 유지하는 인물입니다. 종려처럼 극적인 변화는 없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어려운 역할이에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흔들리지 않게 연기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것, 강동원은 그걸 특유의 절제된 눈빛과 몸짓으로 해냈습니다. 두 배우가 한 화면에 있을 때의 긴장감은 이 영화의 가장 큰 자산이었습니다.
신분제 - 의병 내부에서 터진 균열
전,란이 기존 임진왜란 영화들과 가장 다른 점은, 의병을 낭만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보통 이런 영화에서 의병은 외적에 맞서 하나의 뜻으로 뭉치는 집단으로 그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는 의병 내부에서도 균열이 생긴다는 걸 보여줍니다. 천민 출신 의병과 양반 출신 의병의 시각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어요.
또 하나 마음에 걸린 장면이 있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길거리에서 백성들이 굶어 죽어가는데, 어딘가에서 풍악 소리가 들려 안을 들여다보니 양반이 기생과 어울리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는 일본 점령기에 부역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했지만, 일제강점기의 친일 부역자 구조와 자연스럽게 겹쳐 읽혔습니다. 비슷한 권력 구조와 배신이 시대를 달리하며 반복된다는 것, 그걸 영화가 대사 한 줄 없이 조용히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이 없다면 거짓말입니다. 일본 장수 겐신의 비중이 과하게 느껴졌고, 최후의 삼파전까지 끌고 가는 건 조금 무리가 있었습니다. OTT 시리즈로 만들어졌다면 두 사람의 관계를 훨씬 촘촘하게 담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아요. 그래도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동안 두 사람 생각을 했습니다. 좋은 영화란 그런 거 아닐까요. 다 보고 나서도 자꾸 떠오르는 장면이 있는 것. 저한테는 그게 끝까지 풀지 않은 붉은 끈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