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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입니다. 포스터에서 김고은, 박지현 두 사람 얼굴만 보고 "이 정도면 연기는 걱정 없겠다"는 생각 하나로 시작했는데, 어린시절 장면에서 거의 미동도 않하고 몇 편을 내리 본 것 같아요. 국민학교 교실 칠판 글씨체, 애들 교복, 선생님이 출석 부르는 방식까지. 제 기억 속 어딘가에 있던 장면들이 화면에 그대로 펼쳐지는데, 이게 단순한 향수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절 제가 느꼈던 감정, 딱히 이름 붙이기 어려웠던 그 감정이 갑자기 다시 올라왔습니다. 제 어린시절 사진을 찾아보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린시절 — 이름 없는 감정의 정체
극 중 류은중과 천상연은 둘 다 82년생입니다. 타임라인이 제 기억과 정확히 겹치는 탓에, 보는 내내 그냥 제 어린 시절 속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국민학교 때 저희 반에도 뽀얗고, 공부 잘하고, 집도 잘 사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친구 옆에서 뭔가 말로 설명이 안 되는 감정을 자주 느꼈는데요. 부럽다고만 하기엔 뭔가 더 있는, 그 찝찝함 같은 거요.
드라마는 이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지 않습니다. 그냥 보여줍니다. 반 풍경, 칠판 글씨, 애들이 입고 있는 옷, 교실 특유의 그 분위기까지. 80년대 초반에 국민학교를 다닌 분들이라면 아마 같은 순간에 멈추게 될 겁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아역 배우들 연기가 특히 놀라웠습니다. 어른도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아역이 행동과 표정으로만 쌓아가는데,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천상연 역 아역 배우가 류은중을 바라볼 때의 그 표정, 그게 전부였습니다. 대사 필요 없었습니다. 이 첫 단추가 제대로 꿰어졌기 때문에, 이후 성인 배우들의 감정선이 납득이 됐습니다. 아역이 흔들렸다면 드라마 전체가 흔들렸을 겁니다.
열등감 — 서로를 향한 부러움
이 드라마에서 가장 잘 담아낸 부분이 있습니다. 류은중은 천상연의 능력과 환경을 부러워하고, 천상연은 류은중의 성품과 가족의 따뜻함을 부러워합니다. 둘 다 서로를 기준점으로 삼아 자기 자신을 갉아내리고 있었던 거요. 그리고 이 사실을 너무 늦게 압니다. 이 허망함이 드라마 후반부에서 꽤 강하게 전달됩니다.
천상연이 일기를 들킨 장면에서 폭발하는 이유가 딱 그겁니다. 자기가 꽁꽁 숨겨뒀던 찌질한 감정이, 하필이면 자신이 열등감을 느끼는 그 사람한테 발각된 거잖아요. 저도 그 장면에서 살짝 얼굴이 달아올랐습니다. 나도 그런 감정이 있거든요, 아직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면서 속으로는 비교하고, 비교한 자신을 또 자책하는 그 루프 말입니다.
드라마가 이 감정을 대사로 설명하지 않고 행동과 표정으로 누적시키는 방식이 좋았습니다. 설명하지 않으니까 오히려 더 정확하게 박혔습니다. 보는 사람이 스스로 채워 넣게 만드는 구조였습니다. 그렇게 채워 넣다 보면 어느 순간 화면 속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고 있게 됩니다.
안락사 — 마지막 선택 앞의 침묵
천상연이 스위스에서 조력자살을 선택하는 장면에서 끝도 없이 울었습니다. 스위스는 디그니타스(DIGNITAS) 같은 기관을 통해 본인 의지와 의료 요건을 충족할 경우 조력자살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나라입니다. 국내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주제인데요. 저도 예전에 막연하게 그 선택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직접 경험하기 전에 화면 속에서 먼저 보게 된 기분이 참 복잡했습니다. 드라마가 이 장면을 처리하는 방식이 절제돼 있어서 더 오래 남았습니다. 설명도 없고, 판단도 없고, 그냥 선택과 그 선택 앞에 선 사람만 보여줬습니다. 박지현이 이 장면을 들고 있는데,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온몸으로 드러내는 연기를 이렇게 해내는 걸 보고 처음으로 '이 배우, 앞으로 계속 보게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고은은 워낙 두터운 배우라 믿고 봤지만, 이번엔 박지현이 더 강하게 남았습니다. 14화, 15화 후반부가 살짝 늘어진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나머지 13편은 15부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빠르게 넘어갔습니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 사이에 태어난 분들이라면 특히,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튀어올라 당황할 수 있습니다. 그게 이 드라마의 힘인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