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드라마 평가가 대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 정해지는 사람입니다. 재밌었으면 재밌었던 거고, 별로였으면 거기서 끝입니다.
그런데 <레이디 두아>는 좀 이상했습니다. 다 본 직후에는 "오, 재밌네" 정도였습니다. 사흘쯤 지나니 설거지를 하다가도 자꾸 생각이 났고, 일주일 뒤에는 평가가 한 단계 더 올라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면 몇 개가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됐고, 그때마다 처음 볼 때는 놓쳤던 의미가 하나씩 붙었습니다. 보고 난 뒤에 점수가 오르는 드라마는 제 경험상 정말 드뭅니다.
시작은 거창하지 않았습니다. 딱히 할 일 없는 밤에 시간이나 때우자고 넷플릭스를 켰고, 썸네일에 신혜선 얼굴이 보이길래 별생각 없이 눌렀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두 시였고, 여덟 편이 끝나 있었습니다.
※ 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벽 두 시까지 붙잡혀 있던 밤
고백하자면 저는 화제작이라고 해도 1, 2화쯤 지나면 슬쩍 휴대폰을 집어 드는 시청자입니다. 화면에선 드라마가 흘러가고 눈은 인스타그램에 가 있는, 그런 사람이요.
그런데 이날은 휴대폰이 소파 쿠션 사이 어딘가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찾을 생각조차 안 했다는 걸 다 보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나중에 곱씹어보니, 매 화가 끝날때마다 저는 이 여자, 진짜 누구지…? 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던거죠.
보통 이런 드라마는 다음 사건이 궁금해서 다음 화를 누르게 됩니다. 그런데 <레이디 두아>는 그 궁금증을 사람한테 걸어둡니다. 주인공이 회차마다 다른 이름, 다른 말투, 다른 표정으로 나타나니, 저는 범인이 궁금해서라기보다 그 사람이 궁금해서 다음 화를 눌렀습니다.
명품 구매대행이나 신분 세탁, 상류층 사교 모임처럼 뉴스에서 한 번쯤 본 것 같은 일들이 계속 나와서 더 실화처럼 느껴졌습니다. 새벽 두 시에 TV를 끄면서 든 생각은 하나였습니다. 아… 내일 출근인데 큰일 났다. 그때만 해도 이 드라마가 며칠 뒤까지 저를 따라다닐 줄은 몰랐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다르게 말하는 여자
이 드라마에서 제일 오래 마음에 남은 건, 끝까지 사라킴이 누구인지 확정해주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극 중에서 그녀를 만난 사람들은 전부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능력 있는 사업가였고, 누군가에게는 가장 의지했던 친구였고,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구해준 은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전부 빼앗아간 사기꾼이었습니다.
신기한 건 이 증언들이 하나도 거짓말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다 진짜 같습니다. 실제로 그녀가 거쳐 간 이름도 한두 개가 아닙니다. 백화점 명품 매장 직원이었던 시절의 이름, 사업 자금을 모으던 시절의 이름, 위장 결혼을 위해 만든 이름, 브랜드 대표로서의 이름. 그 이름을 겪은 사람의 수만큼 사라킴이 존재합니다. 누구의 이야기를 듣느냐에 따라 사라킴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거죠.
그래서 회가 거듭될수록 질문이 슬쩍 바뀝니다. 사라킴은 누구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왜 각자 보고 싶은 모습만 골라서 믿어버리는가 쪽으로요. 저는 이 질문이 살짝 뜨끔했습니다. 사실 저도 사람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때가 많거든요.
저는 마지막회까지 본명이 나오길 기다렸습니다. 어린 시절은 이랬고, 원래 이름은 이거였다는 친절한 설명이요. 그런데 드라마는 끝내 그걸 주지 않았고, 다 보고 사흘쯤 지나니 그게 이 작품의 가장 잘한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본명이 밝혀지는 순간 이 인물은 그냥 사연 있는 사기꾼 한 명으로 정리됐을 겁니다.
신혜선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백화점 유니폼을 입은 얼굴과 지사장 정장을 입은 얼굴이 같은 배우라는 걸, 저는 보는 중에 몇 번씩 까먹었습니다. 말투와 걸음걸이, 웃는 각도까지 다 다릅니다. 특히 우아하게 고객을 응대하던 사람이 어느 회차에서 완전히 날것의 얼굴로 무너지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서 저는 소리 내서 "뭐야" 하고 말해버렸습니다. 혼자 보고 있었는데도요. 다 보고 나니 ‘이 얼굴들을 신혜선 한 사람이 찐으로 다 했구나’ 싶어 다시 놀랐습니다.
검색창에 쳐 본 '빈센트 앤 코'
드라마 중반, 국내에서 만든 부두아 가방의 일부 부품을 영국에서 조립한 뒤 유럽산 명품으로 들여오는 장면이 나옵니다. 저는 여기서 설마 이런 사기가 실제로 가능할까 싶었습니다.
궁금증을 못 참고 검색창에 몇 글자 쳐 봤는데, 진짜 있었습니다. 2006년 빈센트 앤 코 사건입니다.
중국산과 국산 저가 부품으로 경기도 시흥의 공장에서 시계를 만든 뒤, 스위스 현지 법인과 수입 절차를 이용해 정식 스위스 명품처럼 포장한 사건이었습니다. 원가 8만 원가량의 제품이 수백만 원에 팔렸고, 일부 제품에는 최고 9,750만 원의 가격표가 붙었습니다. 유럽 왕실만 쓰는 시계라는 소문을 퍼뜨렸고, 톱스타 협찬까지 받았고, 청담동에 매장을 열었습니다. 드라마가 이 사건을 모티브로 삼았다고 확인된 건 아니지만, 빈센트 앤 코와 수법이 많이 닮아 있었습니다.
밤에 드라마 하나 보고 나서 이십 년 전 사기 사건 기사를 뒤지고 앉아 있는 제 모습이 좀 웃기긴 했습니다. 그런데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기사를 읽다가 손이 멈춘 대목은 수법이 밝혀지기 전까지 그 시계가 실제로 명품 대접을 받았다는 부분이었습니다. 차고 다니던 사람들은 자랑스러웠을 거고, 주변에서는 부러워했을 겁니다. 스위스 장인도, 왕실도, 아무것도 없었는데 말이죠.
요즘도 가끔 그 시계 주인들을 생각합니다. 사기라는 뉴스가 터진 날, 그 사람들은 손목에 있던 시계를 어떻게 했을까요. 바로 풀어서 버렸을까요, 아니면 서랍 깊숙이 넣어뒀을까요. 어느 쪽이든 그 시계는 뉴스가 나오기 전날까지는 분명히 진짜였을 겁니다. 적어도 차고 있던 사람의 손목 위에서는요.
드라마를 다 보고 이 사건까지 읽고 나니, 결국 사라킴이 판 건 가방이나 시계가 아닌, 사람들이 갖고 싶고 믿고 싶어 했던 이름과 환상이었습니다. 극 중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볼 수 있나요?" 라는 대사가 있는데, 저는 반박할 말을 아직 못 찾았습니다.
저 역시 사람이나 물건을 볼 때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보다 남들이 붙여놓은 이름과 가격표를 먼저 보고 있었지 않았나 생각해봤습니다. 드라마를 다 본 뒤에도 자꾸 장면들이 떠올랐던 건, 그 질문에서 저 역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넷플릭스 드라마 <레이디 두아>에 대하여
2026년 2월 13일 공개된 <레이디 두아>는 가짜일지라도 명품이 되고 싶었던 여자 사라킴과 그녀의 정체를 추적하는 형사 박무경의 이야기를 그린 8부작 미스터리 스릴러 드라마입니다. <인간수업>과 <마이 네임>의 김진민 감독이 연출하고 추송연 작가가 극본을 맡았으며, 신혜선과 이준혁을 비롯해 박보경·김재원·정진영·배종옥·이이담이 출연합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사라킴으로 추정되는 시신이 발견되지만, 주변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과 얼굴의 사라를 기억합니다. 박무경은 계속해서 달라지는 진술을 따라가며 그녀가 누구였는지 파해칩니다. 관람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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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확신하기 어려웠던 긴장이 좋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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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넷플릭스 코리아, 네이버 영화 <눈동자> 포토
※ 참고 자료
- 넷플릭스 <레이디 두아> 공식 작품 정보
- 신혜선 배우 인터뷰
- 2006년 빈센트 앤 코 사건 관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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