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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쇼츠를 올려보다가 갑자기 “회사는 네가 없어도 잘 굴러간다. 다른 사람을 뽑아서 그 자리에 앉히면 되니까.”라는 내용의 짧은 영상을 보게 됐는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내 자리, 대체 가능하겠다 싶었습니다. 회사는 내가 없어도 별문제 없이 돌아가겠구나 생각했죠. 그런데 계속 곱씹다보니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사실이 내가 그곳에서 아무 의미 없는 사람이라는 말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울 수 있어도, 그 자리에 앉아 보낸 시간까지 대신할 수는 없으니까요.
극장에서 봤던 ‘미키17’이 그때 다시 떠올랐습니다.

익스펜더블이라는 직업
2025년 2월 국내 개봉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 ‘미키17’은 죽으면 새로운 몸으로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 미키의 이야기입니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미키는 우주 식민지 개척 임무에서 위험한 일을 도맡습니다. 죽고나도 전 기억이 담긴 새로운 몸이 다시 만들어지니까요. 열여섯 번의 죽음 뒤에 만들어진 17번째 미키. 사람의 이름 뒤에 제품 번호처럼 숫자가 붙습니다.
익스펜더블은 영어로 소모품이라는 뜻입니다. 쓰고 버려도 되는 것. 영화는 그 단어를 꽤 담담하게 씁니다. 미키가 스스로도 어느 정도 받아들인 것처럼요.
익스펜더블 시스템은 미키의 몸뿐 아니라 저장된 기억까지 복사합니다. 시스템만 보면 이전 미키가 죽어도 같은 기억을 가진 다음 미키를 출력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미키17이 죽은 줄 알고 미키18을 프린트한 순간, 문제가 생깁니다. 미키17이 살아 돌아온 겁니다.
두 사람은 거의 같은 기억에서 출발했지만 말투부터 행동까지 전혀 다릅니다. 미키17은 늘 눈치를 보고 몸을 움츠리지만, 미키18은 화를 참지 않고 먼저 덤벼듭니다. 로버트 패틴슨은 같은 얼굴로 이 차이를 분명하게 만들어냅니다. 둘이 한 화면에 있어도 어느 쪽이 17이고 어느 쪽이 18인지 헷갈리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몸과 기억을 복사했다고 같은 사람이 다시 나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기억을 가진 두 사람도 그 순간부터 서로 다른 선택을 합니다. 이 지점에서 ‘내 자리는 대체돼도 나는 대체 안 된다’는 생각이 시작됐습니다.
미키18이 자기 죽음을 선택한 순간
미키17과 미키18처럼 같은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는 ‘멀티플’이 발각되면, 규정상 두 사람 모두 처형되고 기억 백업까지 삭제됩니다. 처음에 미키18이 미키17을 없애려 한 것도 둘 중 하나라도 살아남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영화의 마지막에서 미키18은 미키17에게 단순히 자리를 양보하지 않습니다. 마셜은 두 미키에게 폭탄 조끼를 입히고 크리퍼를 죽이는 경쟁을 시킵니다. 그러던 중 크리퍼들은 죽은 새끼에 대한 대가로 한 인간의 죽음을 요구하고, 미키18은 마셜에게 달려들어 함께 폭사합니다.
그 직전 미키18은 자신도 두렵다고 말합니다. 죽으면 다시 프린트되는 익스펜더블이 아니라, 이번에 죽으면 정말 끝나는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두려움이었습니다. 미키18의 마지막은 쓸모가 적은 사람이 물러난 장면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죽을지 처음으로 스스로 결정한 순간에 가까웠습니다.
그동안 미키의 죽음은 늘 다른 사람이 시킨 일이었습니다. 위험한 실험에 들어가고, 독성 물질을 먹고, 임무에 투입되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의 미키18은 마셜이 정해준 죽음이 아닌 자기 선택을 합니다. 같은 죽음인데도 전혀 다르게 보였던 이유였습니다.
회사 매뉴얼을 만들었던 날
쇼츠를 보면서 든 생각이 이어지다가 예전 회사 입사 초반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 회사에는 업무 매뉴얼이 없었습니다. 인수인계는 말로 했고, 당장 급한 일 정도만 알려주는 수준이었습니다. 부딪치면서 배우는 게 거기선 당연한 방식이었는데, 저는 그게 불편했습니다. 체계가 없는 것 같고, 같은 실수가 반복되는 것 같고요.
솔직히 귀찮았습니다. 처음부터 매뉴얼을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아니었고요. 업무를 하다 보면 분명히 내가 한 번 했던 일인데 다시 하려니까 헷갈리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중간중간 메모를 해뒀습니다. 기억하려고요.
어느 날 메모해둔 것들을 쭉 훑어보니 업무 내용 전반에 대한 내용이 꽤 쌓여 있었습니다. 저는 그걸 다 모아서 정리했고 저만의 매뉴얼이 만들어졌죠. 솔직히 귀찮았지만 끝내고나니 뿌듯했습니다. 저 혼자 보려고 만들었는데 우연히 옆 직원이 그걸 보게 됐고, 나중에는 회사의 공식 업무 매뉴얼이 됐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만든 매뉴얼은 다음 사람이 제 자리를 더 쉽게 채울 수 있도록 만든 물건입니다. 제가 없어도 업무가 돌아가게 했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오히려 저를 더 쉽게 대체할 수 있게 됐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매뉴얼을 만든 시간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다음 사람은 완성된 문서에서 시작하겠지만, 아무것도 없던 자리에서 헷갈릴 때마다 한 줄씩 메모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다음 사람은 또 자기 방식으로 내용을 고치고 보태겠지만, 그 매뉴얼이 처음 만들어진 과정까지 가져갈 수는 없습니다.
업무는 넘겨줄 수 있고 매뉴얼도 복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무엇이 불편한지 알아차리고, 그것을 하나의 문서로 만든 경험은 제게 남았습니다. 미키의 기억을 다른 몸에 옮겨도 미키17과 미키18이 같은 사람이 되지 않았던 것처럼요.
회사는 나 없이도 돌아가겠지만
쇼츠를 보면서 처음 든 건 억울함 같은 것이었습니다. 내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말이, 그동안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처럼 들렸거든요.
그런데 ‘미키17’을 다시 떠올리며 생각이 조금 달라졌습니다. 대체 가능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이 맡았던 자리였습니다. 회사는 빈자리에 다른 사람을 앉히고 계속 움직입니다. 영화 속에서도 한 미키가 죽으면 다음 번호의 미키가 같은 업무를 이어받습니다. 시스템은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키17과 미키18이 동시에 살아 있는 모습을 보면, 그 둘을 같은 사람이라고 말하기 어려워집니다. 같은 기억을 가졌어도 성격이 다르고, 두려워하는 것이 다르고, 마지막에 내린 선택도 다릅니다. 회사가 누군가를 같은 자리에 앉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전 사람이 없었던 일이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존재감을 더 키워야겠다는 결론은 내리지 않기로 했습니다. 대체되지 않으려고 더 많이 일하고, 더 중요한 사람이 되려 애쓰는 것도 결국 사람의 가치를 쓸모로 판단하는 방식일 테니까요. 저까지 저 스스로를 소모품처럼 여기지 않으면 그걸로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회사는 지금도 별문제 없이 돌아가고 있을 겁니다. 제 자리에도 다른 사람이 앉아 있겠지요. 그래도 그 회사 업무 매뉴얼의 첫 문장을 쓴 사람이 저였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미키17> 포토
※ 참고 자료
- 영화 <미키17> 공식 작품 정보
- 서울신문 – 봉준호 감독 <미키17>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