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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스터 속 레이첼 맥아담스의 얼굴을 보고 재생 버튼을 눌렀습니다. 제 최애 영화 <어바웃 타임>의 메리가 나오는 또 다른 시간여행 로맨스라니. 혹시 두 영화가 어디선가 연결되는 건 아닐까 하는 기대도 살짝 있었습니다.

     

    <어바웃 타임>은 제가 싸운 날 밤마다 꺼내 보는 비상약 같은 영화라서, 같은 배우가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볼 이유가 충분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두 영화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보는 내내 어딘가 겹쳐 보였습니다. 마치 같은 이야기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나눠 가진 것처럼요.


    2009년 개봉한 <시간여행자의 아내>는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이 연출한 시간여행 로맨스입니다. 오드리 니페네거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고, 에릭 바나와 레이첼 맥아담스가 부부를 연기합니다.

     

    여담이지만 레이첼 맥아담스는 이 영화와 <어바웃 타임>, <미드나잇 인 파리>까지 시간여행 로맨스에만 세 번 나왔는데, 정작 본인은 한 번도 시간을 여행하지 않습니다. 매번 시간여행자를 사랑하고, 기다리는 쪽입니다.

     

    세 편 모두에서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표정을 짓는걸 보면, 할리우드가 이 배우에게 기다림이라는 배역을 전담시킨 게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그게 어떤 자리인지 조금 알게 됩니다.

     

    같은 배우, 완전히 다른 온도

    헨리는 유전자 이상으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 속을 튕겨 다니는 남자입니다. 언제 사라질지 모르고, 어디로 갈지도 모르고, 옷조차 가져가지 못해서 도착한 시대마다 알몸으로 떨어집니다.

     

    그래서 그는 자물쇠 따는 법과 남의 옷을 훔치는 법부터 익혀야 했습니다. 능력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생존의 기술들입니다.

     

    클레어는 여섯 살 때 자기 집 뒤 풀밭에서 미래에서 온 헨리를 처음 만났고, 그 뒤로 평생 그를 기다리다가 결혼합니다. 남편을 만나기 전에 이미 남편을 그리워하며 자란 사람인거죠. 줄거리 요약은 이 정도면 됩니다.


    <어바웃 타임>의 팀은 벽장에 들어가 주먹을 쥐면 원하는 순간으로 갑니다. 가고 싶을 때 가고, 돌아오고 싶을 때 돌아옵니다. 헨리에게는 그 선택권이 없습니다. 팀은 잘못한 일을 고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지만, 헨리는 갑자기 사라지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같은 시간여행인데 한 사람에게는 선물같은 기회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평생 벗어날 수 없는 병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안타까운 <어바웃 타임> 같았습니다. 밝은 쪽을 먼저 봐버린 사람이라 그런지 어두운 쪽이 두 배로 어둡게 보였습니다.

     

    기다리는 사람들의 지친 얼굴

    <어바웃 타임>을 보고 나면 오늘을 잘 살아보고 싶어지는데, 이 영화는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에는 악역이 없습니다. 누구 하나 일부러 상처를 주는 사람은 없는데 헨리가 사라지는 일이 반복될수록 클레어도 헨리도 점점 지쳐갑니다. 결혼식 날에도, 부부싸움 도중에도, 가장 곁에 있어야 할 순간에도 헨리는 예고 없이 사라집니다.

     

    심지어 결혼식장에서도 사라져서, 머리가 희끗해진 미래의 헨리가 대신 나타나 식을 올립니다. 신부 입장에서는 남편이 늙어서 돌아온 결혼식인거죠. 웃긴 장면인데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라진 자리에 남는 건 방바닥에 구겨진 옷 한 벌입니다. 요란한 효과음도 없이 옷이 툭-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전부입니다. 저는 이 옷 무더기가 나올 때마다 마음이 내려앉았습니다. 사람이 사라진 자리를 저렇게 조용하게 보여주는 영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약속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 사람을 기다려본 적이 있다면 짐작이 갈 겁니다. 삼십 분만 지나도 오만가지 생각이 드는 게 기다림인데, 클레어는 그 일을 인생 단위로 합니다.

     

    클레어의 얼굴은 영화가 진행될수록 눈에 띄게 지쳐갑니다. 사랑은 그대로인데 사람이 닳아가는 겁니다. 주변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밀을 아는 친구들도, 헨리 자신도 이 능력에 시달리느라 서서히 방전됩니다.

     

    보는 저까지 같이 피로해질 정도였는데, 그래도 저는 그 피로가 싫지는 않았습니다. 기다림이라는 게 원래 그렇다는걸 아는 채로 만든 영화 같아서요.

     

    로또 번호를 알아 온 남편

    그래도 환하게 웃게 되는 장면이 하나 있습니다. 헨리가 미래에서 당첨 번호를 알아 와 복권 1등이 되고, 그 돈으로 클레어에게 꿈꾸던 집을 안겨주는 장면입니다. 시달리기만 하던 능력이 처음으로 두 사람을 위해 일한 순간입니다. 화면 속 두 사람이 소리를 지르며 좋아하는데, 소파에서 보던 저까지 덩달아 들떴습니다.

     

    고백하자면 저는 여기서 아주 세속적인 부러움을 느꼈습니다. 나한테도 저런 일이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영화의 슬픔이고 뭐고 잠시 잊고 진심으로 생각했습니다.

     

    숫자 여섯 개면 되는데 싶고요. 시간여행까지 바라지도 않고 딱 그 능력의 부스러기 정도면 저는 충분히 감사하며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영화 내내 무거웠던 마음이 이 장면에서 잠깐 숨을 쉬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중에 두 사람에게 닥치는 일들이 더 아프게 느껴졌습니다. 이 부부에게도 이렇게 웃던 시절이 있었다는 걸 관객이 기억하게 되니까요.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 포스터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라는 말

    친구와 저녁 먹으면서 이 영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어머니를 떠나보낸 친구입니다. 한참 영화 얘기를 하던 친구가 눈시울을 붉히면서 그러더군요. 헨리처럼 시간을 오갈 수 있다면 엄마를 다시 볼 수 있을 텐데, 그럴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저는 아무 대답도 못 했습니다. 영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영화 이야기가 아니게 돼버려서요. 위로랍시고 무슨 말을 보태는 대신 그냥 같이 조용히 있었습니다.

     

    그날 밤 집에 오면서 이 영화의 제목을 다시 생각했습니다. 시간여행자의 아내. 제목부터가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고 남아서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이 이렇게 오래 사랑받는건, 우리 모두에게 돌아가고 싶은 순간과 다시 보고 싶은 얼굴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리고 이 영화가 왜 슬픈지도 그날 더 분명해졌습니다. 헨리는 그리운 시간으로 돌아가 그리운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지만, 몇분 있다 또 헤어져야 합니다. 다시 볼 수 있다는 건 분명 부러운 일이지만, 언제 또 사라질지 모른 채 만나는 일도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친구에게 <어바웃 타임>은 아직 권하지 못했습니다. 그 영화에는 아버지와 마지막 탁구를 치는 장면이 있으니까요. 대신 언젠가 친구가 그 장면을 볼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옆에 같이 앉아 있을 생각입니다. 휴지는 제가 챙겨서요.

     

     

    ※ 이미지 출처: (주)일레븐엔터테인먼트 제공

    ※ 참고 자료 : 영화 시간여행자의 아내 공식 작품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