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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는 조금 이상한 습관이 있습니다. 누군가와 크게 다툰 날 밤이면 이 영화를 틀어놓습니다. 화가 잔뜩 난 상태 그대로 재생 버튼을 누릅니다.
    처음부터 그러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은 밤, 아무 영화나 틀어놓고 잠들 생각이었는데 하필 고른 게 <어바웃 타임>이었습니다. 그날 저는 잠드는 데 실패했습니다. 대신 두 시간 내내 울다가 웃다가 하면서, 이상할 만큼 개운해진 마음으로 누워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죠.


    그 뒤로 <어바웃 타임>은 저의 비상약이 됐습니다. 효과는 매번 비슷합니다. 영화가 끝날 때쯤이면 화가 증발해 있습니다. 리얼로요.
    2013년 개봉한 영화 <어바웃 타임>은 리처드 커티스 감독이 각본과 연출을 맡고, 도널 글리슨과 레이첼 맥아담스, 빌 나이가 출연한 시간여행 로맨틱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사랑 영화로 기억한 적이 별로 없습니다.
    저한테 이건 가족 영화고, 시간에 관한 영화고, 무엇보다 화를 다루는 영화입니다.

     

    영화 어바웃타임
    영화 어바웃타임

     

    싸운 날 밤의 재생 버튼

    <어바웃 타임>은 제 최애 영화입니다. 몇 번을 봤는지 못셉니다. 줄거리를 다 외우고 있고, 다음 장면에서 누가 무슨 표정을 지을지도 아는데 이상하게 볼 때마다 같은 자리에서 웁니다.

    우는 방식이 좀 이상하긴합니다. 웃긴 장면에서 분명히 웃고 있는데 눈물이 납니다. 슬퍼서 울기보단 평소에는 잊고 지내던 사람들, 매일 봐서 오히려 잘 보이지 않던 얼굴들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이 소중해져서 감정이 막 폭발합니다.


    팀과 메리의 결혼식 장면. 식이 시작되자마자 폭풍이 몰아쳐 천막이 날아가고, 하객들은 쫄딱 젖고, 공들여 준비했을 모든 것이 엉망이 됩니다. 그런데 화면 속 누구도 그 하루가 망가졌다는 얼굴을 하지 않습니다. 젖은 채로 웃고, 젖은 채로 춤을 춥니다.
    저는 여기서 꼭 웃으면서 웁니다. 그 사람들이 그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미 충분히 좋은 하루가 있다는 걸, 영화가 대단한 설명 없이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싸워서 씩씩거리며 영화를 보다가도 이 장면쯤 오면 다시 그 사람 생각이 납니다. 방금 전의 미운 표정 말고, 언젠가 같이 웃었던 얼굴 쪽으로요.


    그러면 거의 끝난 겁니다. 제 화는 이 영화의 러닝타임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화라는 건 그 사람의 가장 미운 부분만 확대해서 보여주는 돋보기 같은 겁니다. <어바웃 타임>은 두 시간 동안 그 돋보기를 슬쩍- 가져갑니다. 그리고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서로를 잃는다는, 너무 당연해서 평소에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다 보면 조금 전까지 그 사람의 말투가 어땠는지를 따지고 있던 마음이 갑자기 시시해집니다. 말투를 따질 시간에 한 번이라도 더 웃는 게 남는 장사라는 계산이 서는 겁니다.

     

    어바웃 타임 명장면|아버지와 치는 마지막 탁구

    줄거리는 간단합니다. 스물한 살이 된 팀은 아버지에게 집안 남자들이 과거의 특정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처음에는 그 능력을 연애에 쓰고,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과 자신의 인생을 위해 사용합니다.
    줄거리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이 영화의 좋은 점은 시간여행이라는 설정을 데려와 놓고,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시간여행과 상관없는 곳에 두었다는 데 있으니까요.


    제가 매번 무너지는 지점은 정해져 있습니다. 팀이 아버지와 마지막으로 탁구를 치는 장면입니다.
    대단한 대사가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공이 왔다 갔다 하고, 두 사람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그 평범함이 사람을 울려버립니다. 마지막이라는걸 아는 사람들이 보내는 너무나 평범한 오후라서요.


    만약 두 사람이 부둥켜안고 울부짖었다면 저는 오히려 덜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공을 넘기는 손과 평소와 똑같은 농담. 이별이 저런 얼굴을 하고 온다는 게 저는 아직도 조금 무섭습니다.


    이 장면은 볼수록 더 아픕니다. 처음 영화를 봤을 때는 팀과 메리의 연애를 따라가느라 바빴는데, 요즘은 온통 아버지만 보입니다.
    서재에서 책을 읽다가도 아들이 찾아오면 하던 일을 내려놓는 아버지, 결혼식 축사에서 아들 자랑을 하다가 목이 메는 아버지. 같은 영화인데 볼 때마다 주인공이 바뀝니다. 아마 십 년 뒤의 저는 또 다른 장면 앞에서 울고 있을 겁니다.


    팀은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로 돌아가 아버지와 바닷가를 걷습니다. 물수제비를 뜨고, 손을 잡고, 함께 웃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 마지막으로 고른 순간이 대단할 것 하나 없는 아버지와의 평범한 오후였다는 것. 저는 여기서 완전히 무너집니다.
    이 장면들을 보고 나면 꼭 휴대폰을 집어 들게 됩니다. 딱히 할 말도 없으면서 카톡을 열어봅니다. ‘뭐 해?’라고 쓸까 말까 하다가 그냥 닫은 날도 많습니다.


    그래도 열어는 봤습니다. 그땐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웃긴 건 정작 당사자에게 끝까지 연락하지는 못한단 겁니다. 화가 사라지는 것과 먼저 손을 내미는건 완전히 다른 문제니까요.
    그래도 그 사람에 대한 미움이 빠져나간 그 어정쩡한 상태로라도 하루를 넘기는게 어디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음 날 얼굴을 보면 목소리가 한 톤쯤 풀려 있습니다. 그 정도면 영화 한 편 값은 충분히 한 셈입니다.

     

    팀이 두 번 사는 하루

    영화 후반에 팀은 아버지의 조언대로 같은 하루를 두 번 살아봅니다.
    첫 번째 하루의 팀은 지루한 회의와 급한 점심시간, 여동생의 전화와 법정 일정, 퇴근길 지하철까지 모든 일을 귀찮고 버겁게 받아들입니다. 재판에서는 원하는 결과를 얻지만 기뻐할 여유도 없이 하루를 넘깁니다.


    두 번째 하루에도 일어난 일은 같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동료에게 웃어주고, 여동생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봅니다. 퇴근길 지하철에서 흘러나오는 음악도 가만히 즐깁니다.
    하루는 그대로인데 그 하루를 보는 눈만 달라졌습니다. 그것만으로 완전히 다른 하루가 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매번 뜨끔합니다. 제 하루에도 두 번째 기회가 있다면 다르게 보였을 순간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충 끊어버린 전화나 건성으로 받은 인사, 귀찮다는 표정부터 지었던 순간 같은 것들이요.


    문제는 저한테는 시간을 되돌리는 능력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자꾸 다시 트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를 두 번 살 수는 없으니까, 영화를 두 번 보는 걸로요.
    그 효과는 한 이틀 정도는 갑니다. 영화를 본 다음 날 아침에는 지하철 창밖이 조금 다르게 보이고, 늘 마시던 커피도 평소보다 맛있습니다. 물론 그 이후엔 도로 원래의 저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잊을 만하면 다시 이 영화를 찾게 됩니다.


    영화의 끝에서 팀은 결국 시간여행을 그만둡니다. 되돌아갈 필요가 없도록 처음부터 오늘이 다시 오지 않을 하루인 것처럼 살아보기로 합니다. 저는 이 결말이 좋습니다. 능력을 더 쓰는 쪽이 아니라, 그 능력이 필요 없어지는 쪽으로 걸어가는 이야기라서요.

     

    <어바웃 타임>이 오랫동안 사랑받는 이유도 저는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간여행은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영화가 마지막에 하는 말은 그런 능력이 없는 우리도 오늘부터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을 다시 오지 않을 하루처럼 바라보는 것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실천 대신 관람을 택한 사람입니다. 잊을 만하면 영화를 다시 틀어놓고, 두 시간 동안 빌려온 눈으로 제 하루를 돌아봅니다.
    물론 다음 날이면 또 까먹고 평소대로 삽니다. 지하철에서 인상을 쓰고, 전화를 미루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제일 함부로 굴다가 또 누군가와 싸웁니다.
    그런 날이 오면 저는 그날 밤 어김없이 <어바웃 타임>을 틀 겁니다. 그리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쯤에는 방금까지 미웠던 그 사람에게 보낼, 말도 아닌 말을 고르고 있겠지요. ‘뭐 해?’ 정도의 말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