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제가 첫 직장 수습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회사에서 인정을 받고 싶어서 항상 머릿속에 일밖에 없었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주일 정도를 준비했던 보고자료가 있었는데 팀장님한테 형편없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것도 크리스마스 이브날에요. 일주일 내내 머리싸매고 준비했는데 팀장님한테도 너무 서운했고 마음이 착잡하고 우울한 기분이 풀리지가 않았습니다.
같이 사는 친구는 그걸 알 리가 없었고, 퇴근길에 크리스마스 케이크를 사 들고 집에 왔습니다. 파티 준비를 하자는 친구한테 저는 막 쏘아붙였습니다.
“지금 그거 할 때야?”
싸움이 됐습니다. 친구는 많이 서운해했고, 저는 그 와중에도 제 얘기만 계속했습니다. 분이 풀리지 않아서요. 나중에 화해는 했지만 뭔가 예전 같지 않은 느낌이 한동안 남았습니다. 친구가 워낙 성격이 좋아서 다시 가까워졌지만, 아마 지금 그날 얘기를 꺼내면 저보고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할 겁니다.
영화 <리얼 페인>을 보다가 그날 밤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벤지라는 사람
제시 아이젠버그가 감독·각본·주연을 맡은 이 영화는 데이비드와 벤지, 두 사촌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기 위해 폴란드 유대인 역사 투어를 함께 떠나는 이야기입니다.
영화를 처음 보기 시작했을 때 저는 데이비드편이었습니다. 벤지는 공항에서부터 튑니다. 낯선 사람한테 먼저 말을 걸고, 호텔 옥상에서 대마를 피우자고 하고, 가이드가 설명하는 중간에 끊고 들어갑니다. 같이 여행 가면 피곤한 사람이요. 당연히 그렇게 봤습니다.
그런데 루블린의 옛 유대인 묘지에서 벤지가 가이드에게 따지듯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숫자와 사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는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존재와 고통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요. 일행이 어색해지고, 저도 처음에는 ‘또 분위기를 망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틀린 말이었냐고 물으면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투어 일행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같은 버스에 타고, 같은 유적지 앞에 섭니다. 그 사이에서도 벤지는 유난히 눈에 띕니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금세 웃게 만들다가도, 어느 순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분위기를 얼어붙게 합니다.
이상했던 건 함께 여행하는 사람들은 데이비드보다 벤지에게 더 빨리 마음을 열었다는 겁니다. 벤지는 상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보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고, 처음 만난 사람의 말에도 거리낌 없이 반응합니다. 예의 바르게 웃고 적당한 선을 지키는 데이비드보다, 때로는 선을 넘어버리는 벤지 곁에서 사람들이 더 편하게 웃습니다.
데이비드도 그런 벤지를 부러워합니다. 자신의 삶은 안정되어 있지만 사람의 마음을 단번에 끌어당기는 힘은 벤지에게 있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벤지가 불편하면서도 화면에서 그를 계속 찾았습니다. 다음에는 또 무슨 말을 해서 분위기를 망칠지 걱정하면서도, 그가 조용해지면 오히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습니다. 싫다는 말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감정이 너무 크면
벤지는 할머니와 유난히 가까웠던 사람입니다.영화가 진행될수록 그가 이 여행에 온 이유가 조금씩 드러납니다. 좋은 직장도, 안정된 관계도 없고, 우울증이 있고, 한때는 스스로를 해치려 했던 적도 있습니다. 벤지의 감정 과잉은 단순히 타고난 성격만은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웃고 떠들다가 갑자기 가라앉는 것도, 어쩌면 자신을 버티게 하는 방식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키어런 컬킨이 이 역할을 합니다. 터지듯 웃다가 갑자기 조용해지는 순간들을 표정 하나로 이어붙이는데, 억지스럽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여행을 마치고 공항에 돌아온 뒤 다시 혼자 자리에 앉아 있는 마지막 장면. 아무 말도 없고,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데 그냥 보게 됩니다. 피곤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그대로였는데, 그 피곤함이 어디서 오는 건지는 달리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벤지가 자리를 비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데이비드는 그를 사랑하지만 함께 있으면 지친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그 말이 나오는 순간 저는 그날 밤 친구 얼굴이 생각났습니다. 케이크 들고 신나서 들어왔다가 제 표정을 보고 굳어버린 얼굴이요.
케이크를 들고 들어온 친구
데이비드가 벤지를 향해 참아왔던 마음을 쏟아내도 두 사람 사이의 문제가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폴란드까지 와서 할머니의 흔적을 따라가도 벤지의 슬픔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감정이 너무 크면 말로 꺼내놓는 것만으로는 줄어들지 않는 모양입니다.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도 그랬습니다. 친구에게 실컷 쏟아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날 밤 저는 친구가 얼마나 들떠서 집에 들어왔는지 제대로 보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었던 게 아니라, 제 머릿속에 다른 사람을 들여놓을공간이 없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제 예민한 감정이 더 먼저였던 겁니다.
제가 나중에 사과했을 때 친구가 뭐라고 했는지 솔직히 기억이 잘 안 납니다. 그래도 화해는 했고, 다시 가까워졌습니다. 그날 밤 잠깐, 저는 벤지였습니다.
벤지가 왜 저랬는지 다 이해했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벤지 같은 사람을 마주칠 때, 그 피곤한 에너지 뒤에 뭐가 있는지 이전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하게 될 것 같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 그 밤처럼, 실컷 쏟아냈는데도 풀리지 않는 무언가를 안고 있는 사람일 수 있으니까요.
▶ 함께 보면 좋은 글
지나간 사랑을 다시 만난다면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는 작품입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리얼 페인>, <만약에 우리>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리얼 페인> 공식 작품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