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목차
※ 스포주의
마이클은 감옥에 있는 한나에게 오랜 시간 테이프를 보냅니다. 두 사람이 함께 읽었던 책을 낭독한 카세트 테이프를.
주소도 알고 있었고, 한나에게 직접 찾아갈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편지 한 통, 면회 한 번을 하지 않습니다. 그냥 테이프만 보냈습니다.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를 보고 나서 저는 마이클만 계속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테이프, 기묘한 소통방식
영화는 열다섯살 마이클과 서른 여섯살 여인 한나의 만남으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은 짧고 강렬한 여름을 보내면서 마이클은 한나에게 책을 읽어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아무런 설명도 없이 사라집니다.
수년 뒤 마이클은 법대 세미나 수업의 일환으로 참관한 법정에서 피고인석에 앉은 한나를 발견합니다. 한나는 나치 강제수용소 감시원으로 일하며 수감자들을 죽음으로 보내는 선별에 참여했고, 교회에 갇힌 수백 명이 화재로 숨질 때도 문을 열어주지 않았습니다.
법정에서 다른 피고인들은 사건 보고서를 한나가 작성했다고 주장합니다. 한나는 자신이 문맹이라 보고서를 쓸 줄 모르지만, 그걸 밝히느니 그냥 자신이 썼다고 인정해버립니다. 그러고는 다른 경비원들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을 지고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재판을 지켜보던 마이클은 한나가 글을 읽고 쓰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만 재판정에서 말하지 않습니다. 이후 감옥으로 테이프를 보냅니다. 오디세이, 전쟁과 평화, 체호프의 단편들.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계속 보냈습니다. 편지는 한 통도 없이.
이게 안 이상하다면 영화가 워낙 자연스럽게 흘러가기 때문일 겁니다.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꽤 이상한 행동이거든요. 연락하는 척 하면서 연락하지 않는 거잖아요. 목소리는 보내는데 말은 걸지 않는 것. 너무도 기묘한 소통 방식.
테이프 속에는 한나를 원망한다는 말도, 아직 잊지 못했다는 말도, 재판에서 침묵한 이유도 없습니다. 한나가 대답할 수 있는 질문조차 없습니다.
용서도 단죄도 하지 않는 방법
현재의 한나와 대화하려면 마이클은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바라봐야 합니다.
한나는 자신이 사랑했던 첫사랑이지만, 열다섯 살인 자신과 관계를 맺은 어른이기도 합니다.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난 사람이면서 수백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전범입니다. 마이클은 그런 한나를 여전히 사랑하는지, 용서할 수 있는지, 재판에서 침묵한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는지 결정해야 합니다. 이런 감정들을 정면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두려움이 있었을 겁니다.
책을 읽어주는 동안에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마이클은 수용소 감시원이었던 현재의 한나와 대화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견딜 수 있는 과거의 한나에게만 책을 읽어줍니다. 그 안에서 그는 계속 책을 읽어주는 소년이고, 한나는 말없이 듣는 여자입니다.
그래서 테이프는 한나에게 가는 길이면서도, 마이클이 그 길의 끝까지 가지 않도록 막아주는 장치처럼 보였습니다. 연결이자 차단인거죠. 한나를 완전히 버리지는 않지만 다시 받아들이지도 않고, 용서하지도 단죄하지도 않은 채 낭독 속에 가둬두는 방식입니다.
한나가 자기 문장을 보내기 시작했을 때
한나는 마이클의 녹음테이프를 들으며 혼자 글을 배웁니다. 교도소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찾아 소리와 문장을 맞춰보고, 마침내 자신의 손으로 쓴 편지를 보냅니다.
이 장면부터 두 사람의 오래된 구조가 깨집니다. 한나는 더 이상 마이클의 목소리를 말없이 듣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평생 감춰온 문맹을 스스로 넘어선 뒤, 남의 문장이 아닌 자신의 문장으로 마이클에게 말을 겁니다.
그 편지에 답하려면 마이클도 자기 말을 해야 합니다.
한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왜 테이프를 보냈는지, 왜 찾아가지 않았는지. 책 속 인물의 감정을 대신 읽는 것으로는 피할 수 있었던 질문들입니다. 마이클이 답하지 않은 이유는 한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목소리에 응답하려면 자신도 더는 남의 문장 뒤에 숨을 수 없었기 때문인지 모릅니다.
출소를 앞두고 마이클은 처음으로 한나를 면회합니다. 수십 년 만의 만남입니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는 어색하고, 마이클은 한나가 감옥 밖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준비를 돕겠다고 말합니다. 숙소, 일자리, 생활비 같은 것들을요. 한나는 그 면회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이 결말을 처음 봤을 때, 저는 마이클의 방문이 한나에게 어떻게 느껴졌을지 생각했습니다. 20년을 기다렸는데 마지막에 찾아온 사람이 꺼낸 말이 출소 후 생활 준비였다면. 그게 배려였는지, 거리였는지…
영화는 마이클을 나쁜 사람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그가 한나를 사랑했다는 사실도 의심하게 만들지 않습니다. 다만 사랑하는 방식이 있고, 그 방식이 상대에게 어떻게 닿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조용히 보여줍니다.
마이클이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낸 순간
케이트 윈슬렛은 한나 역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불쌍하게만 보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쉽게 미워할 수도 없게 만드는 연기였습니다. 그치만 저는 랄프 파인즈가 연기한 중년 마이클의 얼굴이 더 기억납니다.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는데, 그 안에는 사랑과 원망, 수치심과 죄책감이 한꺼번에 눌려 있습니다. 감정이 없는 얼굴이 아니라 감정을 어느 쪽에도 놓지 못한 얼굴로 보였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에 마이클은 딸을 한나의 무덤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누구에게도 제대로 꺼내지 못했던 과거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책 속 문장을 읽어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말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나에 대한 용서인지, 자신을 위한 정리인지, 딸에게 건네는 뒤늦은 고백인지는 모릅니다. 다만 마이클은 그제서야 책을 읽어주는 사람의 자리에서 나옵니다.
한나에게는 끝내 보내지 못했던 자신의 문장을, 다른 사람에게 처음으로 말하기 시작한 겁니다.
▶ 함께 보면 좋은 글

영화 버닝 리뷰|나는 분명히 거기 있었는데
결말을 확인하고도
의심이 사라지지 않는 작품을 좋아한다면
이 글로 이어가 보세요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버닝> 포토
※ 참고 자료
-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공식 작품 정보
- 미국 아카데미 공식 수상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