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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한테 먼저 연락이 왔습니다. 영화 보고 나왔다고, 눈이 너무 부어서 지하철을 못 탈 것 같다고. "박지훈 눈이 너무 슬퍼. 진짜 너무 울었어." 딱 그 한 마디였습니다. 그 문자를 받고 저도 바로 예매를 했습니다. 평소에 사극을 즐겨 보는 편은 아닙니다. 계유정난, 단종, 엄흥도. 교과서에서 배운 건 알지만 솔직히 이름 외우기 바빴던 기억만 납니다. 그런데 막상 극장에 앉아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는, 그런 생각이 싹 사라졌습니다. 12세에 왕이 되어 이듬해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먼 산골짜기로 쫓겨난 열다섯 살 아이. 그 아이의 눈을 보는 순간 교과서 속 단종이 아니라 진짜 살아있는 사람이 느껴졌습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 불이 켜졌을 때, 주변에서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였고요.

유해진 — 표정 하나로 전부를 말한 배우
엄흥도는 처음에 그리 대단한 사람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옆 마을에서 양반을 모셔오면 마을 살림이 나아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유배지를 유치하려고 동분서주하는 시골 촌장입니다. 충성심이나 의리 같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그냥 먹고살아야 하는 현실적인 이유로 움직이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평범한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 단종 곁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그 변화가 드라마틱하게 연출되지 않는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섭게 마음에 박힙니다. 그냥 밥을 같이 먹다 보니, 같이 자다 보니, 그 아이가 신경 쓰여버린 겁니다. 유해진 배우가 대사 한 마디 없이 표정 하나로 감정을 전달하는 장면들이 있는데, 거기서 진짜 연기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단종이 다슬기를 처음 먹어보고 맛있다고 했을 때 이홍위가 애드리브로 던진 "알겠다. 기억하마"라는 한 마디에 엄흥도가 짓는 표정. 그 표정 하나가 이 영화의 절반을 담고 있습니다. 웃기다가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는 순간들이 전부 유해진이 만들어내는 온도에서 비롯됩니다. 타짜의 고광렬, 해적의 철봉이와 결이 비슷한 캐릭터라는 말도 있지만, 그럼에도 엄흥도는 유해진이 아니면 완성될 수 없었을 인물이었습니다.
박지훈 — 두려움과 체념과 의지가 담긴 눈빛
약한영웅을 보고 나서 박지훈이라는 배우를 눈여겨보게 됐습니다. 연시은이라는 캐릭터가 워낙 강렬했거든요. 그래서 이번에는 기대를 안고 극장에 앉았는데, 솔직히 그 기대를 훨씬 넘어섰습니다. 왕위를 빼앗기고 한명회 앞에 서 있는 이홍위의 눈빛. 분노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뒤섞인 감정들이 한꺼번에 담겨 있는 그 눈이 화면을 통해서도 그대로 전달됩니다. 역할을 위해 15킬로를 감량했다고 하는데, 야위고 왜소한 몸이 대사보다 먼저 단종의 고통을 말해주었습니다. 짧은 대사를 할 때조차 물 한 모금 못 마신 사람처럼 목소리가 말라 있어야 했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정말로 그렇게 들렸습니다. 친구가 "박지훈 눈이 너무 슬퍼"라고 했던 말이 극장에 앉아서 바로 이해됐습니다. 광천골 사람들과 어울리며 조금씩 웃음을 되찾는 장면들이 더 슬픈 건, 관객은 그 웃음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웃을 때마다 가슴 한켠이 더 묵직해졌습니다. 결말부에서 활줄로 마지막을 맞이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극장 전체가 조용해졌습니다. 울음소리만 간간이 들렸고요.
역사 — 누가 진짜 역적이었는가
이 영화를 보면서 내내 머릿속을 맴돈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누가 역적이고 누가 충신이었을까. 영화 속에서도 한명회는 계속 단종의 측근들을 역적이라는 명분으로 처단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역적을 만든 건 권력을 찬탈한 쪽이었죠. 장항준 감독이 인터뷰에서 밝힌 말이 있습니다. "성공한 쿠데타에 박수를 치는 게 괜찮을까"라는 질문에서 이 영화가 시작됐다고요.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말이 다시 떠올랐을 때, 단순한 사극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습니다. 유지태가 연기하는 한명회는 기존 사극의 간신 이미지와 달리 벌크업된 거구에 저음의 목소리로 등장합니다. 실제 조선왕조실록에 묘사된 한명회가 키가 크고 얼굴이 잘났으며 존재감만으로 무리에서 돋보였다는 기록을 반영한 것인데, 그 선택이 영화의 긴장감을 한 층 높여주었습니다. 100킬로까지 증량했다는 유지태의 몸에서 나오는 위압감은 화면 밖으로도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촬영 중 우연히 날아와 유해진의 어깨에 내려앉았다는 노랑나비. CG가 아니라 실제 현장에서 날아온 것이라는 이야기를 나중에 알고 나서 다시 그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엄흥도의 진심에 하늘이 응답한 것 같다는 말이 괜한 과장이 아니었습니다.
왕과 사는 남자는 사극이 낯선 분들도, 역사를 잘 모르는 분들도 불편함 없이 볼 수 있는 영화입니다. 중반까지는 광천골 사람들과의 일상이 웃음을 만들고, 후반으로 갈수록 그 웃음이 묵직한 감동으로 바뀝니다. 흰쌀밥에 생선구이, 다슬기, 전. 영화 내내 나오는 음식들이 한식을 당기게 만드는 건 덤입니다. 손수건은 꼭 챙겨 가시길 바랍니다. 친구가 눈이 붓도록 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건, 이 영화는 보고 나서 기분 좋게 털어지는 영화가 아닙니다. 마지막 장면이 오래 머릿속에 남습니다. 선택할 수 없는 삶, 벗어날 수 없는 권력, 그리고 끝내 인간으로 돌아가지 못한 한 사람의 마지막. 그걸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기 때문에 극장을 나와서도, 집에 돌아와서도, 자려고 누워서도 계속 생각납니다. 이 가슴 한켠을 누르는 듯한 여운이 이 영화를 단순한 사극이 아니라 오래 기억되는 영화로 만들어줍니다. 1600만 명이 극장을 찾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WCVGPvEHVfA&t=40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