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때를 생각하면 색이 선명합니다. 지금은 하루가 다 비슷비슷한데, 그 사람과 보냈던 시간만큼은 유난히 또렷합니다. 주말 오후,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내고 영화 <만약에 우리>를 틀었습니다.
뭔가 평범한 듯한 제목이었지만 구교환이 나오니까 재생 버튼을 눌렀고, 보다가 재미없으면 중간에 다른 영화로 갈아탈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처음과는 전혀 다른 마음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끝나고 나서는 문가영이란 배우가 궁금해져서 어떤 작품을 했는지 찾아보기까지 했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구교환을 보려고 틀었는데 자꾸 문가영이 보였습니다
구교환 배우는 예상했던 구교환이었습니다. 장난처럼 말을 던지다가도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는 순간 장면의 공기가 달라졌습니다. 웃기고 엉뚱한 모습과 초라해진 모습을 오가는 은호가 구교환에게 잘 어울렸습니다.
예상 밖이었던 건 문가영이었습니다. 처음 등장한 정원은 진한 화장에 거친 말투를 쓰고, 누군가에게 쉽게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것처럼 굴었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게 혼자 버티는 데 익숙해진 사람이 만들어낸 표정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진한 화장과 날 선 말투가 조금씩 옅어지는데, 은호와 함께하면서 자연스럽게 편안해지는 정원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가영은 인터뷰에서 20대 초반의 정원은 목소리 톤을 높이고 말끝을 정확히 맺지 않는 식으로 나이대별 말투를 달리했다고 밝혔습니다. 초반의 진한 화장과 뜯어진 네일 같은 세세한 부분도 정원의 불안정한 시기를 보여주기 위해 더한 설정이었다고 하는데, 그걸 모르고 봤을 때도 변화는 충분히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문가영의 우는 연기. 좋다는 감상보단 정원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울 수밖에 없었는지가 먼저 보였습니다. 특히 버스 안에서 울음을 참는 장면이 그랬습니다. 소리를 내서 울 수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든 버티려 하는데, 참으려고 할수록 얼굴이 더 서러워 보였습니다.
저장된 번호를 지우는 순간에는 반대로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도, 손가락이 삭제 버튼 위에 잠깐 머물렀다가 내려갈 뿐인 그 짧은 망설임을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번호를 지운다고 그 사람과 보낸 시간까지 지워지는 건 아니니까요.
두 사람을 갈라놓은 건 한 번의 싸움이 아니었습니다
<만약에 우리>의 이야기가 아주 새롭지는 않습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청춘이 만나 사랑하고, 꿈과 생활에 치이다가 멀어진 뒤, 성공한 모습으로 다시 만납니다. 이미 여러 영화에서 보아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은호와 정원의 이별은 이상할 만큼 현실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사람은 분명 싸웠지만, 싸움 한 번으로 끝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은 뜻대로 되지 않고, 돈은 부족하고, 친구들은 하나씩 자리를 잡는데 자신들만 제자리인 것 같은 시간이 계속 쌓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될 때도 있지만, 내가 초라하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그 사랑조차 부담스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하지 않아도 혼자 자존심이 상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 할 때 괜히 화부터 내게 됩니다.
은호가 무너지는 과정에서 가장 답답했던 것도 그 부분이었습니다. 정원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은호는 자신의 처지를 견디지 못해 정원까지 밀어내고 있었으니까요.
이 장면들을 보다가 대학생 때 만났던 전 남친이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진짜 결혼까지 생각했을 만큼 서로를 너무 좋아했습니다. 그 사람은 법대생이었고 4학년이 되면서 사법고시를 준비했고, 하루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보냈습니다. 저는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시작하면서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었습니다.
처음에는 시험이 끝나면, 취업만 하면 다시 예전처럼 만나자고 서로를 다독였습니다. 그런데 연락은 하루에 몇 번에서 며칠에 한 번으로 줄었고,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연락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게 됐습니다.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했던 기억도 없습니다. 그냥 어느 시점부터 이미 연인이라 부르기 어려운 사이가 되버렸던 거죠.
은호와 정원도 비슷했습니다. 사랑이 남아 있는데도 각자의 하루를 버티느라 상대에게 내어줄 마음의 자리가 조금씩 줄어든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친 은호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서 도서관에 앉아있던 그 사람의 뒷모습이 자꾸 겹쳤습니다.
이 영화는 보통의 회상 장면과 반대로 과거를 컬러로, 현재를 흑백으로 보여줍니다. 저는 그 방식이 조금 얄밉도록 정확하다고 느꼈습니다. 지금의 무채색 현실에선 서로가 없이도 살아갈 수는 있지만, 선명한 색으로 반짝거리는 그 시절 그때의 마음은 절대 가질 수가 없으니까요.
연인의 이별보다 아버지의 편지가 더 슬펐던 이유
영화에서 저를 가장 많이 울린 건 은호 아버지가 정원에게 남긴 편지였습니다.
가족 없이 자란 정원에게 은호는 연인이기 전에 처음으로 돌아가고 싶은 집이 되어준 사람이었습니다. 은호 아버지가 차려준 밥을 먹고, 함께 명절을 보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정원은 잠시나마 가족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문가영도 정원에게 은호와 은호의 아버지가 '집'과 같은 존재였다고 설명했습니다.
긴 연애가 끝날 때 잃는 건 연인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자주 드나들던 집, 함께 먹던 밥, 안부를 물어주던 부모님과도 어느 날부터 만나지 못하게 됩니다. 정원은 은호와 헤어지면서 겨우 생겼던 가족까지 한꺼번에 다시 잃은 셈이었습니다.
그런 정원에게 아버지의 편지는 누구의 잘못도 묻지 않습니다. 왜 은호를 떠났느냐고 나무라지도 않고, 다시 돌아오라고 붙잡지도 않습니다. 두 사람의 인연이 끝내 잘되지 않았더라도 정원은 자신들에게 고마운 사람이었다고 말해줍니다.
저는 여기서 눈물이 막 줄줄 흘렀습니다. 네가 우리 가족을 실망시킨 게 아니라는 말, 함께했던 시간을 미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정원은 그제야 들은 겁니다.
김도영 감독 역시 원작에서 가장 마음에 남았던 부분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꼽았습니다. 모든 인연이 잘될 수는 없다는 그 문장에 공감했고, 그 말을 붙잡고 이 영화를 리메이크하고 싶었다고 밝혔습니다. 저도 결국 감독이 붙잡았다는 바로 그 지점에서 무너졌습니다.
정원이 은호에게 한때 자신의 집이 되어줘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겁니다. 그 인사는 그때의 사랑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이제야 제대로 인정하는 말이었습니다.
마지막에 흑백이었던 정원의 현재에 색이 돌아오는 장면도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데요. 은호가 없어도 정원의 삶은 계속될 것이고, 이제는 그 사랑을 실패한 시간으로만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에 가까웠습니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대학생 때 만났던 제 전 남친이 도서관에 앉아 있던 모습이 한동안 떠올랐습니다. 지금 그 사람이 사법고시에 붙었을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 저는 전혀 모릅니다. 다만 그때 우리가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사실까지 지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우리>는 어떤 영화일까?
2025년 12월 31일에 개봉한 <만약에 우리>는 <82년생 김지영>을 연출한 김도영 감독의 멜로·로맨스 장르의 영화입니다. 김도영 감독이 각색하고 염문경·김하나 작가가 각본을 맡았으며, 구교환과 문가영이 은호와 정원을 연기했습니다. 신정근 등이 함께 출연했고, 러닝타임은 114분, 관람등급은 15세 이상 관람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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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보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 이미지 출처: 네이버 <만약에 우리> 포토, 넷플릭스 코리아
※ 참고 자료
- 영화 <만약에 우리> 공식 작품 정보
- 씨네21 「로맨스의 정원, <만약에 우리> 배우 문가영」 인터뷰
- 시사위크 「김도영 감독의 시선으로, ‘만약에 우리’」 인터뷰
- 영화 <만약에 우리> YouTube 리뷰 (김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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