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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주의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던 날, 팀장님한테 문자를 보냈어요. 저 양성 나왔어요, 이번 주 쉬어야 할 것 같아요. 팀원들에게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일 걱정은 하지말고 푹 쉬어요, 우리 괜찮아요.”
근데 저는 그 말을 그냥 믿질 못했어요. 제가 빠진만큼 누군가의 하루가 길어진다는 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이마에 열이 펄펄 끓는데도 노트북을 폈습니다. 괜찮다는 말을 들었는데도 괜찮지 않았어요. 미안한 마음이 먼저였거든요.
넷플릭스 영화 〈정점〉을 보다가 그 일이 떠올랐습니다.

죄책감. 감정의 정점
사샤는 호주 오지로 혼자 카약을 타러 갑니다. 남편 토미를 잃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예요. 두 사람이 함께 절벽을 오르다 사고가 났고, 사샤는 토미를 붙잡고 있다가 결국 놓았습니다. ‘생존의 정점’에서 살려면 놓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고나서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그 죄책감을 끌고 사샤는 오지로 들어가고 거기서 벤을 만나게 됩니다.
벤은 인간 사냥꾼이입니다. 근데 이 사람이 단순히 힘센 살인마였다면 영화가 덜 무서웠을 거예요. 이 사람 진짜 소름인 게 사샤의 죄책감을 사냥합니다.
먹이사슬 꼭대기에서 ‘포식자의 정점’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벤은 사샤의 과거부터 조사합니다. 토미를 구하지 못했다는 상처를 정확히 골라서 건드려요. 사샤가 토미의 얼굴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구도를 계속 만들어냅니다. 사샤는 한계를 넘어서 버티고요. 이게 훨씬 위험하죠.
벤이 건드린 죄책감은 ‘지형적 정점’인 마지막 절벽에서 정점을 찍습니다. 로프 끝에 매달린 포식자 벤, 그 무게에 함께 끌려 내려가는 사샤, 연결을 끊어야만 살 수 있는 상황까지 첫 번째 추락과 닮아 있어요. 이 ‘감정의 정점’에서 죄책감은 사샤를 약하게 만들면서도 계속 움직이게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인지, 토미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서인지 스스로도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요.
저도 그랬거든요. 이마에 불이난 상태로 밥도 몇숟갈 못 넘겼는데도 노트북을 닫지 못했던 건 체력이 남아서가 아니었어요. 팀원들한테 미안하다는 감정이 몸의 신호를 계속 눌렀던 거예요. 결국 회복도 더뎠고 출근 직전까지도 개운하게 낫지는 않더라구요. 죄책감은 그런 식으로 작동해요. 당장은 뭔가를 하게 만들지만 나중에 더 많은 값을 치르게 됩니다.
신뢰와 포박
영화 초반에 토미가 사샤한테 하는 말이 있어요. 등반 파트너는 함께 오르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상대가 판단력을 잃었을 때 대신 멈춰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고요. 그래서 토미는 사샤가 무리한다고 느꼈을 때 말합니다. 멈추자고…
벤은 반대예요. 사샤를 자신에게 묶어요. 로프로 연결하고, 사샤의 힘을 이용해 자기가 살아남으려 합니다. 사샤를 살리려는 게 아니라요.
겉으로는 둘 다 로프로 묶인 관계인데, 토미의 로프는 신뢰였고 벤의 로프는 포박이었습니다. 같이 묶여 있다고 모두 파트너는 아니죠
돌이켜보면 저에게도 멈춰도 된다고 말해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말을 믿지 못했다는 것이었어요. 믿어버리면 노트북을 닫아야 하는데, 닫는 순간 제가 팀을 버린 사람이 되는 것 같았거든요. 제 스스로가 저를 묶어놓고 있었습니다. 그때 필요했던 건 더 버티는 힘이 아니라, 파트너의 “멈추자”를 믿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도달한 진짜 정점
영화의 마지막 절벽 장면은 첫 번째 추락과 닮았습니다. 로프와 절벽, 그리고 그 끝에 매달린 사람이 있어요. 사샤는 같은 선택을 해야합니다.
벤을 절벽에서 놓은 뒤, 사샤는 바다 앞에 서요. 토미의 나침반을 꺼내 물에 던집니다. 이 장면을 처음 볼 때는 토미를 잊는다는 뜻인 줄 알았어요. 근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사샤가 버리는 건 토미의 기억이 아니라, 토미가 죽은 그 순간을 자기 남은 인생의 방향으로 삼아온 방식이에요.
나침반은 원래 길을 찾는 도구인데, 사샤한테는 오랫동안 길을 막고 있던 물건이었던 거죠.
영화 제목은 〈정점〉입니다. 사샤는 마지막에 가장 높은 절벽까지 올라갑니다. 그런데 사샤가 도달한 진짜 정점은 절벽 꼭대기가 아니었습니다. 토미의 나침반을 바다에 던진 순간이었습니다. 이게 리얼입니다. 진짜로요.
절벽 정상에서는 사샤의 울음과 웃음이 한꺼번에 터지지만 바다 앞의 사샤는 오히려 조용해요. 나침반에 입을 맞춘 뒤 물속으로 던지는 짧은 동작만으로 토미와 작별합니다.
몸을 끌어내리던 무게와 마음을 붙잡던 무게를 차례로 내려놓는 결말이었습니다. 살아남는 것과 살기로 선택하는 것은 다르거든요. 사샤의 ‘조용하지만 진짜인 이 마지막 정점’이 제게 묵직한 울림을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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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 넷플릭스 코리아, 네이버 영화 <더 리더: 책 읽어주는 남자 리뷰>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정점> 공식 작품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