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변기를 닦는 장면을 보며 마음이 편안해진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절대 편안하지 않거든요. 더러워진 변기의 모습과 냄새를 잘 아니까요.
영화 <퍼펙트 데이즈>의 히라야마는 작은 거울을 변기 아래로 밀어 넣어 눈에 보이지 않는 곳까지 확인합니다. 얼룩이 남지 않도록 몇 번이고 닦고, 다음 화장실에서도 똑같은 동작을 반복합니다.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 문득 조금 우스워졌습니다. 남이 매일 변기를 닦는 모습에서는 평온함을 느끼면서, 정작 제가 매일 반복하는 설거지와 문서 작업, 출퇴근은 지긋지긋했으니까요. 똑같이 되풀이되는 일인데 히라야마의 반복에는 리듬이 보였고, 제 반복에서는 피로만 느껴졌습니다.
그 차이는 어디에서 생긴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 작품 정보
2024년 7월 3일 국내 개봉한 <퍼펙트 데이즈>는 빔 벤더스 감독이 연출한 124분의 드라마입니다. 야쿠쇼 코지가 주인공 히라야마를 연기했으며, 에모토 토키오, 나카노 아리사, 아소 유미 등이 출연합니다. 야쿠쇼 코지는 이 작품으로 제76회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받았습니다.
도쿄 시부야의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며 혼자 살아가는 히라야마는 매일 비슷한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던 중 젊은 동료와 조카 니코를 비롯한 사람들이 그의 일상에 들어오면서 정해져 있던 생활에 작은 변화가 생깁니다. 영화는 이 만남들을 따라가며 히라야마가 말하지 않았던 가족 관계와 과거를 조금씩 드러냅니다.
변기를 닦는 장면이 왜 아름다웠을까
영화는 히라야마의 반복되는 일상을 따라갑니다.
그는 이른 아침에 일어나 이불을 개고 화분에 물을 줍니다.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뽑은 뒤 카세트테이프를 골라 출근하고, 정해진 화장실을 차례대로 청소합니다. 퇴근 후에는 목욕탕과 단골 식당에 들렀다가 책을 읽으며 하루를 마칩니다.
다음 날에도 거의 같은 일이 반복됩니다. 그런데 영화는 히라야마가 청소하는 모습을 오래 보여줍니다. 히라야마가 청소 도구를 꺼내고, 손이 닿기 어려운 곳을 확인하고, 사용자가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일을 시작하는 과정을 하나하나 따라갑니다.
생각해 보면 저는 깨끗한 화장실은 당연하게 사용하면서, 누가 청소했는지는 궁금해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퍼펙트 데이즈〉에서는 평소라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그 사람이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 남습니다.
우리가 평소 보지 않던 노동을 이렇게 오래 바라봐주었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아닐까요.
히라야마에게는 카메라와 음악이 있었다
관객인 저는 히라야마의 노동을 안전한 거리에서 바라봅니다. 정갈하게 설계된 공중화장실은 하나의 전시 공간처럼 보입니다. 세제 냄새를 맡지 않아도 되고, 하루 종일 몸을 굽혔다 펴는 피로도 느끼지 않습니다. 영화가 골라 보여주는 손의 움직임과 히라야마의 표정만 따라가면 됩니다.
여기에 출퇴근 길에 영화가 붙여준 음악까지 더하면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반복이 될 수 있겠지요. 그렇게 매일 비슷한 장면을 조금씩 다르게 이어 붙인 편집은 단조로운 일과를 하나의 리듬으로 만듭니다.
제 설거지와 문서 작업에는 카메라도 음악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자세히 들여다봐주는 일도 없고, 장면이 충분히 아름다워졌을 때 잘라주는 편집도 없습니다. 다음 날이면 같은 일이 다시 쌓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저 빨리 끝내려고 할 뿐입니다.
카메라 밖에도 히라야마는 많았다
영화를 본 다음 날, 저는 〈퍼펙트 데이즈〉 OST를 틀어놓고 평소처럼 화분에 물을 주고 설거지를 하고 방을 청소했습니다. 늘 빨리 끝내버려야 할 일로만 생각했던 동작들을 똑같이 하면서도 뭔가 특별한 느낌을 느껴보고 싶어서요.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설거지는 여전히 설거지였고, 청소해야 할 방도 그대로였습니다. 다만 음악이 흐르자 제 손의 움직임을 전보다 조금 오래 바라보게 됐습니다. 히라야마의 하루를 보면서 느꼈던 평온함이 제 일상에도 잠시 스며드는 것 같았습니다.
출근하는 버스 안에서도 유튜브 쇼츠 대신 <퍼펙트 데이즈>의 OST를 들어봤습니다. 그리고 운전석 쪽을 바라봤습니다. 정류장마다 차를 세우고 문을 열고 다시 출발하는 기사님의 움직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창밖 거리에서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의 모습도 이전보다 오래 보게 됐습니다. 모두 매일 마주쳤지만 목적지로 향하는 동안 배경처럼 지나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노동이 아름답거나 평온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기사님은 피곤했을 수도 있고, 환경미화원은 그저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달라진 것은 제 시선 뿐이었습니다.
카메라 밖에도 그렇게 반복하며 하루를 이어가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중에는 매일 같은 일을 지긋지긋해하던 저 자신도 있었습니다.
앞으로 루틴이 지긋지긋하게 느껴질 때면 히라야마 씨를 떠올려봐야겠습니다. 잠시 음악을 틀고 제 하루가 ‘퍼펙트’해 보일 수 있게 오래도록 바라보면서요.
▶ 함께 보면 좋은 글
영화 <소공녀> 리뷰|우리는 왜 가난한 사람에게 불행한 표정을 기대할까
타인의 삶을 왜 내 기준으로 아름답다거나 불행하다고 판단하게 되는지
궁금하다면 함께 읽어보세요.
※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퍼펙트 데이즈>, <소공녀>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퍼펙트 데이즈> 공식 작품 정보
'해외 영화 & 애니메이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영화 <그린 북> 리뷰|두 사람 모두 가난했다 (0) | 2026.08.29 |
|---|---|
| 영화 <줄리 & 줄리아> 리뷰|줄리아를 다시 불러낸 줄리, 그다음에 선 나 (0) | 2026.08.19 |
|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 리뷰|우리가 삶을 미루는 두 가지 방식 (0) | 2026.08.17 |
| 영화 <아메리칸 셰프> 리뷰|아들이 아버지에게 가르친 것 (0) | 2026.08.09 |
| 영화 <루프맨> 리뷰|예의는 바르지만 책임은 피한 남자 (0) | 2026.08.0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