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는 요즘 영화를 예전처럼 편하게 보지 못합니다. 장면이 지나갈 때마다 ‘이 부분을 어떻게 써야 재미있을까’, ‘다른 리뷰와 무엇이 달라야 할까’를 먼저 생각합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시작한 블로그인데 어느 순간 영화가 감상보다 글감에 가깝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다 〈줄리 & 줄리아〉를 보면서 오래된 작품을 다시 보고 글로 쓰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습니다. 요리와 글쓰기가 두 여성의 삶을 바꾸는 영화인데, 보고 나니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과도 연결돼 보였습니다.
※ 스포주의|본 포스팅은 작품의 주요 줄거리와 결말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줄리아의 책이 줄리의 하루를 바꿨다
2002년 뉴욕에서 민원 업무를 처리하던 줄리 파웰은 반복되는 직장 생활과 이루지 못한 작가의 꿈에 지쳐 있습니다. 잘나가는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만 제자리에 멈춰 있는 것 같은 답답함도 컸죠.
그걸 돌파하기 위해 새로운 일을 시작합니다. 줄리아 차일드의 요리책에 담긴 524개의 레시피를 365일 동안 만들고 블로그에 기록하는 프로젝트였습니다.
줄리아의 요리책이 줄리에게 건넨 것은 요리 기술만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할 일과 마감이 생겼고 요리를 하나 완성할 때마다 작은 성취도 쌓였습니다. 무엇보다 365일이 지나면 '끝까지 해본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목표가 생겼습니다.
영화는 이 줄리의 시간과 1940년대 말 프랑스에 살던 줄리아 차일드의 시간을 번갈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노라 에프론 감독은 반세기 간격의 두 삶을 교차편집으로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합니다.
줄리는 줄리아를 다시 현재형으로 만들었다
줄리가 줄리아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아닙니다. 줄리아는 이미 오래전에 요리책과 방송으로 이름을 알린 사람이었습니다.
줄리가 바꾼 것은 오래된 요리책을 읽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줄리는 책을 읽는 데서 끝내지 않고 직접 요리했습니다. 양파를 썰고, 살아 있는 바닷가재와 씨름하고, 애써 만든 뵈프 부르기뇽을 태워버리기도 합니다. 성공한 음식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고 다시 만드는 과정까지 블로그에 남겼습니다.
그렇게 수십 년 전에 출간된 요리책은 새로운 독자들이 매일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현재의 사건이 됩니다.
물론 그 연결이 아름답게만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줄리는 줄리아가 자신의 프로젝트 '줄리/줄리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는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이 오랫동안 존경해온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꽤 아픈 일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프로젝트를 마친 뒤 줄리아의 부엌 전시를 찾아가 버터를 놓고 옵니다. 실제 줄리아에게 인정받지 못했어도, 자신이 그에게서 받은 것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 장면이 좋았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나 작품에게서 받은 것이 반드시 원작자의 허락이나 인정까지 받아야 의미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요.
영향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았다
저는 처음에 이 영화를 한 방향의 이야기로 봤습니다. 무료한 일상을 살던 줄리가 줄리아의 요리책을 만나 삶의 목표를 찾는 이야기라고요.
그런데 영화를 다 보고 나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줄리아가 없었다면 줄리의 도전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줄리가 없었다면 줄리아의 요리도 반 세대 뒤의 누군가에게 이렇게 생생한 사건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줄리가 오래된 요리책을 자신의 시대에 맞는 블로그로 옮겼듯이, 리뷰도 지나간 작품을 오늘의 독자에게 다시 건네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보고 난 뒤 제가 처음에 했던 고민도 조금 다르게 보였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이걸 어떻게 글로 써야 할까’를 생각하는 일이 때로는 감상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글을 쓰기 때문에 오래된 영화를 다시 찾아보고, 장면을 한 번 더 생각하고, 누군가에게 그 작품을 다시 건네기도 합니다.
줄리아는 줄리를 움직였고, 줄리는 줄리아를 현재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2009년에 개봉한 이 영화를 2026년에 다시 보고 글을 쓰는 저도 그 연결의 다음에 서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누군가 영화 <줄리 & 줄리아>를 다시 찾아본다면, 오래된 작품은 그렇게 또 한 번 현재가 됩니다.
영화 <줄리 & 줄리아> 작품 정보
2009년 12월 10일 개봉한 <줄리 & 줄리아>는 노라 에프론이 각본과 연출을 맡은 코미디·드라마 장르의 영화입니다. 러닝타임은 123분이며, 줄리아 차일드와 엘릭스 프루돔의 <My Life in France>, 줄리 파웰의 <Julie & Julia>를 바탕으로 했습니다.메틸 스트립이 줄리아 차일드, 에이미 아담스가 줄리 파웰을 연기합니다. 국내 관람등급은 12세 이상입니다.
메릴 스트립이 말투와 웃음, 커다란 몸짓까지 줄리아 차일드 특유의 에너지를 표현하는 모습과 스탠리 투치와의 자연스러운 호흡도 이 영화의 재미입니다. 양파 썰기부터 살아 있는 바닷가재, 타버린 뵈프 부르기뇽까지 완성된 음식보다 그 과정의 수고와 실패를 보여주는 장면들도 함께 눈여겨볼 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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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출처: 네이버 영화 <줄리 & 줄리아>, <아메리칸 셰프> 포토
※ 참고 자료: 영화 <줄리 & 줄리아> 공식 작품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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