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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달 전 친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목소리부터 심상치 않았어요. "엄마가..." 한마디 하고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후 친구는 장례식장에서 손님을 받느라 정신없을 땐 몰랐는데, 발인이 끝나고 집에 혼자 들어가는 순간 갑자기 미친 듯이 배가 고프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냉장고를 열어도, 밥솥을 봐도 먹을 게 없었다고 해요. 정확히는, 엄마가 해주던 그 밥이 없었던 거였습니다. "몸이 그렇게 안 좋으셨는데 한 번을 내색 안 하시고 늘 따뜻한 밥을 차려주셨거든. 그게 너무 그리워서 미치겠어." 친구는 그 말을 하면서 또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 통화를 끊고 며칠 뒤, 영화 <넘버원>을 봤습니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을 때마다 눈앞에 숫자가 보이기 시작하는 남자 하민의 이야기였어요. 그 숫자가 0이 되면 엄마가 죽습니다. 영화관 의자에 앉아있는데 친구의 그 울먹이던 목소리가 자꾸 겹쳐서, 영화가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준비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숫자 - 줄어드는 밥그릇 안에 숨겨진 잔인한 시계
영화의 설정 자체가 정말 영리하면서도 잔인합니다. 평범한 직장인 하민(최우식)은 엄마 은실(장혜진)이 차려주는 집밥을 먹을 때마다 허공에 숫자가 떠오르는 걸 보게 됩니다. 처음엔 그냥 이상한 환각인 줄 알았는데, 그 숫자가 한 끼 한 끼 먹을수록 줄어들고, 0이 되는 순간 엄마가 세상을 떠난다는 걸 깨닫게 되죠. 그때부터 하민은 별의별 핑계를 대며 엄마 밥을 피해 다니기 시작합니다.
이 설정이 무서운 이유는, 사실 우리 모두에게 저 숫자가 있다는 걸 영화가 계속 상기시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숫자를 볼 수 없을 뿐이에요. 부모님과 함께 밥을 먹을 수 있는 횟수는 누구에게나 유한합니다. 명절에 두세 번, 생신에 한 번, 가끔 들르는 주말에 한 번. 따져보면 평생 남은 횟수는 생각보다 훨씬 적습니다. 영화는 그 사실을 숫자라는 시각적 장치로 만들어서 관객의 가슴에 직접 박아 넣어요. 하민이 밥을 피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같이 숨이 막혔습니다. 핑계 대고 약속 잡고, 야근한다고 둘러대고, 다음에 먹자고 미루는 그 모든 장면이 너무 익숙해서 더 아프게 느껴졌어요.
엄마밥 - 아픈 몸을 숨기고 차려낸 마지막 밥상
영화 속 은실은 몸이 점점 안 좋아지는 와중에도 절대 티를 내지 않습니다. 부엌에서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늘 똑같은 얼굴로 국을 끓이고 반찬을 무쳐요. 이 장면들을 보는데 친구의 말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친구 엄마도 그랬다고 했거든요. 통증이 심해서 앉아 있기도 힘든 날에도 굳이 일어나서 찌개를 끓이고, 힘들지 않냐고 물으면 "괜찮아, 얼른 먹어"라는 말만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습니다. 엄마들은 자기가 아픈 것보다 자식이 한 끼 부실하게 먹는 게 더 신경 쓰이는 사람들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끝까지 숨기는 겁니다. 힘들다는 말 대신 밥 한 그릇을 식탁에 올리는 걸로 사랑을 표현하는 거죠. 친구는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 평범했던 밥 한 끼가 사실은 엄마가 자기 통증을 참아가며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는 걸 알았다고 했습니다. 영화 속 은실의 뒷모습과 친구가 했던 말이 겹쳐지면서, 옆자리 관객들의 훌쩍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습니다. 저도 예외는 아니었고요.
안부 - 영화관을 나서며 가장 먼저 떠오른 한마디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데도 다들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을 안 했습니다. 다들 눈이 빨개져 있었어요. 저도 한참을 그대로 앉아있다가, 영화관을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엄마한테 전화하는 거였습니다. 별 용건도 없으면서 그냥 "밥은 드셨어요?"라고 물었어요. 별것 아닌 통화였는데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마음이 좀 놓이더라고요.
<넘버원>은 신파를 강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담담하게, 일상적인 밥상의 풍경만으로 관객을 무너뜨려요. 그래서 더 오래 남는 것 같습니다. 자극적인 사건 하나 없이도 영화관을 나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는 게 이 영화의 진짜 힘이라고 생각해요. 부모님과 다음 식사 약속을 미루고 계시다면, 혹은 오늘따라 유독 엄마 밥이 그리운 날이라면 이 영화를 꼭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보고 나면 분명,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싶어지실 거예요.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엄마 밥'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