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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방, 손가락 하나로 더듬더듬 벽을 짚는 아이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 순간 저는 숨을 멈췄어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일곱 살 아이, 은혜의 첫 등장 장면이었습니다. 평소 영화 보면서 잘 안 우는 편인데, 이날은 시작한 지 10분 만에 눈물이 났습니다. 빚에 쪼들려 전세 보증금 8천만 원을 가로채려고 아이에게 접근하는 사기꾼 제식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처음엔 '저 사람 진짜 나쁘다' 싶다가도 어느새 같이 무너지게 되더라고요.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저는 시청각장애라는 말을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상상도 못 했고요. 이 글에서는 스포일러를 포함해서 제가 직접 느낀 감정 그대로 풀어보려고 합니다. 아직 안 보신 분들도, 이미 보신 분들도 같이 다시 그 순간들을 떠올려보면 좋겠어요

촉각 - 블록 하나로 배운 '아빠'라는 말
제식이 은혜에게 처음으로 글자를 가르치는 장면, 저는 이게 영화 전체에서 제일 좋았어요. 손가락 점자도 아니고 그냥 장난감 블록으로 'ㅇ'이랑 'ㅏ'를 붙여가면서 '아빠'라는 단어를 만드는 건데, 아이가 자꾸 헷갈려서 '빵'을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저는 그 장면에서 웃다가 울다가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제식은 전문 교육을 받은 사람도 아니고, 그냥 본능적으로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감각이 촉각뿐이라는 걸 알아챈 거잖아요. 그게 너무 짠했어요. 저는 평소에 손으로 뭔가를 만지면서 배운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은혜한테는 그게 세상과 연결되는 유일한 통로더라고요. 그런데 은혜가 세상을 느끼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괜히 답답해지더라고요. 눈을 잠깐 감고 있어도 불안한데, 그 상태가 평생이라면 어떨까 싶었습니다. 영화 보고 나서 며칠 동안 괜히 제 손가락을 들여다보면서,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지 새삼 느꼈습니다. 당연하게 누리던 게 사실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는 걸, 이 장면 하나가 가르쳐줬어요.
변화 - 사기꾼이 아빠가 되어가는 그 어색함
제식은 처음부터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장례식장에서 조문객이 안 오니까 속으로 '빌려준 돈이나 받아야지' 하면서 지형의 집을 찾아가는 인물이거든요. 사실혼 관계인 척 연기하고, 집주인 앞에서는 둘러대기 바쁘고요. 근데 저는 오히려 이 얕은 캐릭터 때문에 변화가 더 와닿았어요. 처음엔 '저 인간 빨리 로또나 당첨돼서 떠났으면' 싶다가, 제가 직접 영화를 보면서 느낀 건, 제식이 로또에라도 당첨되길 바라면서 보고 있더라는 겁니다. 그때 알았죠, 완전히 감정이입 됐다는 걸. 2시간 내내 울면서 봤고, 보다가 멈추고 또 보다가 또 울고, 그 패턴이 끝까지 반복됐습니다. 은혜와 제식의 관계는 말로 쌓이는 게 아니라 표정, 촉각, 몸짓으로만 쌓이는데 그게 오히려 더 진하게 다가왔어요. 아역배우 정서연의 연기도 정말 놀라웠습니다. 냄새로 사람을 구분하고 진동으로 날씨를 느끼는 그 섬세한 디테일들이, 연기가 아니라 진짜처럼 느껴졌거든요.
마음 - 은혜가 어디선가 잘 자라고 있기를
마지막에 제식이 결국 돌아오는 장면, 저는 거기서 또 한 번 무너졌습니다. 영화 끝나고 자막 올라가는데도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어요. 은혜가 어디선가 잘 자라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그게 꼭 실제 아는 아이를 향한 마음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우리나라엔 법적으로 정해진 장애 유형이 15가지나 되는데, 정작 은혜 같은 시청각장애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요. 시각장애나 청각장애 중 하나를 골라서 교육받아야 한다는 게 영화 속 설정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도 그렇다는 걸 알고 나니 마음이 더 무거워졌습니다. 거창한 캠페인 영상보다 이 영화 한 편이 훨씬 깊게 박히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 같아요. 작은 것에 감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강의나 책이 아니라 영화 한 편에서 자연스럽게 생겼습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꼭 시간 내서 한번 보시길 권합니다.